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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주장하거나 반론하는 사람들에 대하여삶/생각 2024. 10. 15. 07:54
Intro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했을까?
물론,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무식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진화론자 중 그 누구도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면서 진화론이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기본의 기본도 되어 있지 않다.
일단, 창조론을 비판하고 진화론을 옹호하고 싶다면 일단 진화론이 뭐라고 말하는지는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도 안 되면서 창조론을 비판할 경우.. 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떤 주장을 옹호하려면 그 주장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아야 한다
물론 창조론과 진화론만 그런 것은 아니다. 젠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젠더를 부정해? 너는 멍청해"를 시전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대화를 하다 보면 멍청력에 한숨이 나올 때가 많다. 기본적으로 젠더라는 개념에 대해 옹호하고 싶으면 젠더가 뭔지부터 알아야 한다.
젠더를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나 스스로를 여자라고 생각한다면 그럼 나는 여자야. 이게 바로 젠더다"라고 주장한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그럼 나는 나 스스로를 미국인이라고 생각할래. 그러면 나는 미국인인가?"라고 반박할 수 있다. 누군가를 죽여놓고 "나는 살인자가 아니야"라고 생각한다면 살인가가 아닌 건가?
젠더에 대해 옹호하려면 정말 젠더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서, 성(sex)과 젠더(gender)를 구분하면서 "여자 옷을 입고 싶은 것이 여성 젠더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집에서 애 보고 요리하고 싶은 게 여성 젠더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sex보다 젠더 정체성이 중요해질 때 혼란이 발생한다. 아니, 집에서 요리하고 애 보고 싶은 게 여자라면.. 남자는 집 밖에서 일하는 사람이고, 여자는 집에서 요리하는 사람이 된다.
심지어 여기서 성과 젠더를 분리할 수 없다고 해버리는 순간.. 남자는 밖에서 일하는 사람, 여자는 집에서 애 보는 사람..으로 남녀 차별이 당연한 것으로 고정되어 버린다. 그런데 젠더라는 개념을 옹호하면서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다. 정말이지 이럴 때는 소크라테스가 생각난다. 소크라테스가 와서, "니가 젠더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젠더에 대해 모르는 것이다"라고 말해줬으면 할 때가 많다.
아무튼.. 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저런 사람들을 꽤 많이 만났다. 나는 저런 사람들을 앵무새라고 이야기한다. 자기가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이 그냥 누군가 말한 것을 따라 말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사실은 모르지만 아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아래의 창조론을 비판하는 사람도 그랬다. 이 사람은 문자적 또는 직설법적 6일 창조론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정반대로 문자적 창조론을 비난하는 유신 진화론 앵무새가 되어 버렸다. 총신에서 공부했다는 사람이 극단에서 극단으로 넘어가는 멍청함을 볼 수 있었다. (왜 이게 멍청하냐 하면.. 총신이 가르치지 않는 걸 가지고 "총신이 틀렸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멍청함에 따른 허수아비 논법을 펼치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사람들은 상대방이 뭐라고 말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왜냐면, 누군가 이야기한 것을 되풀이하는 능력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즉, 남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할 능력이 많이 부족하다.
동물의 진화와 인간의 문화에 대해서
내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이다. 동물의 진화와 인간의 진화 사이에 차이점을 설명하는 주장에서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다.
동물 진화의 끝판왕으로 인간을 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의 논리는, 도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인간이 진화했다는 거다.
하지만 기독교인들 중에는 동물의 진화는 인정하되, 인간의 진화는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이 아주 이상한 것도 아니다. 그 근거는 인간이 가진 문화 또는 도구 사용이다.
좀더 설명하자면, 동물들은 환경 변화에 맞춰 신체적 변화를 통해 진화하지만, 인간은 육체적으로 변화하는 대신 문화적, 사회적 변화를 통해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이다. 즉, 환경에 따라 생물체는 두 가지 반응을 보이는데, 하나는 육체적 진화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진화이다. 이해가 가는가?
1. 동물의 진화: 신체적 적응
동물의 진화는 일반적으로 자연 선택에 의해 유도된다. 환경이 변할 때, 동물들은 생존에 유리한 신체적 특성을 선택적으로 물려받아 점차 변형된다. 예를 들어보자.
• 북극곰은 추운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두꺼운 지방층과 하얀 털을 진화시켰다.
• 긴 목을 가진 기린은 높은 나무 잎에 도달하기 위해 목이 길어진 결과로 적응한 것으로 설명된다.
이처럼 동물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직접 신체적 변형을 겪으면서 적응하며, 이 과정은 세대를 거듭해 자연 선택을 통해 이루어진다.
2. 인간의 문화적 적응: 신체 대신 도구와 지식
반면, 인간은 신체적으로는 환경에 크게 적응하지 않았다. 원시 인간부터 현대인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신체적 변화는 비교적 미미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방식으로 환경에 적응하는데, 그것이 바로 문화적 적응이다.
• 인간은 환경에 맞춰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며,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환경적 도전에 대응한다. 예를 들어, 추운 환경에서 인간은 털이 더 많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옷을 만들어 입고 집을 지어 생존한다.
• 지식과 교육을 통해 세대 간 학습이 전달되며, 이를 통해 인간은 환경 변화에 더 빠르게 적응한다. 한 세대가 개발한 농업 기술이나 건축 방법은 그다음 세대에 전달되며 환경 적응을 촉진한다.
• 사회적 규범과 제도 역시 인간의 적응 방식 중 하나이다. 인간 사회는 규범과 법을 통해 협력하고, 협력을 통해 생존과 번영을 꾀한다. 이는 단순히 개체 수준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이다.
3. 문화적 적응과 기술의 진화
인간의 문화적 진화는 단순한 생존 도구의 발전을 넘어서,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 농업의 발달은 인간이 자연 환경을 이용하고 제어하는 방식으로, 인류가 더 이상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지 않게 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로 인해 인간은 환경에 맞춰 신체적으로 적응할 필요 없이, 환경을 변화시키고 이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 도시의 발달과 같은 사회적 변화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의 근본적 변화를 불러왔다. 자연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도시를 만들고 인공 환경을 창조함으로써 그 안에서 생존하도록 자신을 적응시켰다.
이해하지 못한 자들
여기서 논리는 이것이다. 환경에 따라 두 가지 적응 방법이 있다. 하나는 동물들처럼 신체적인 적응 곧 진화를 통해서 적응한다. 다른 하나는 문화적인 적응 곧 도구 사용을 통해서 적응한다. 즉, 환경에 따라 신체적인 적응을 하는 게 아니라 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은, 인간의 진화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있다.
좀더 쉽게 말해서, 혹한기가 되어간다고 해보자. 적자생존을 생각을 해보면, 날씨가 추워지면 털이 많은 생물들만 살아남는다. 100년이 지나면, 100년 전 생물들보다 털이 많은 생물들만 남아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적자생존에 따라 털이 없는 생물들은 추워서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문화를 발전시킨다. 즉, 날씨가 추워지면 두터운 옷을 입는다. 털이 없다고 해도 두터운 옷을 입는다면 살아남아서 자손을 남길 수 있다. 하지만 도리어 털이 있다고 해도 옷을 만들지 못하면 도태되어 버린다. 즉, 환경에 따라 문화가 적응한다면, 털의 유무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 100년 전이나 100년 후나 인간의 육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다만, 인간의 옷에만 차이가 생긴다.
그래서 환경의 변화에 따라 동물은 진화를 하지만, 인간은 문화를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도구를 사용할 수 있고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다면, 인간은 진화를 하지 않는다. 육체 대신 문화가 발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화는 인간의 진화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문화가 진화야" 같은 소리를 하게 된다. (그래, 문화를 사용하기 위해 인간이 진화했을 수는 있겠지..) 즉, 문화가 있다면 육신의 진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거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논리가 인간의 소진화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위의 설명은 문화와 진화가 어떻게 반대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즉, 이 논리를 이해하려면 동물의 진화는 인정하지만 인간의 진화는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이 사람들은 인간의 대진화는 인정하지 않되, 인간의 소진화는 인정한다. 다시 말해,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이종간에) 변하는 건 인정하지 않되, 인간이 인간으로서 점점 키가 커진다거나 하는 변화는 인정한다. 그런 개념에서, 문화와 진화를 대치되는 것으로 봤을 때, 추운 지역에 사는 사람의 피부가 더 두껍다는 걸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바다 근처에서 산다고 아가미가 생긴다거나, 추운 지역에서 산다고 곰이 된다는 그런 대진화를 반대할 뿐이다.
더 생각할 것들
토론을 위해 문화와 진화가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설명하기는 했다. 하지만 물론 (많은 학자들이 다윈은 비판하면서 말하듯이) 문화와 진화는 서로 상보적으로 적용될 수는 있다.
하지만.. 토론을 한다면, 상대방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문화가 있다면 (육신의) 진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개념을 이해는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대화 자체가 진행이 되지 않는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문화와 진화가 왜 서로 대치되는지 그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거다. 전혀 다른 맥락(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진화의 증거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진화되었기 때문이다)으로 이상한 소리를 하게 된다. 이미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도구를 사용할 수 없었던 현생 인류 이전의 존재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즉, 전혀 다른 맥락이 되어 버린다.
최초의 자동차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발전상에서 자전거가 자동차보다 먼저 있었다면서 자전거 이야기하는 것과 똑같을 수 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게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방의 주장이 뭔지는 이해하지 못하는 거다. 엔진이 없는데 어떻게 자동차냐..는 말을 하게 된다. 즉, "엔진을 가지고 있는 차"의 맥락에서 최초의 자동차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맥락을 모르고 엔진이 없는 자전거 이야기를 한다면 카테고리 오류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상대방의 주장을 이해하고 나면 반론은 가능해진다. 문화와 진화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상대방의 주장, 진화와 문화가 대치된다는 말에 대해서는 반론이 가능하다. 문화에 따른 진화를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문화 또한 환경으로 넣고, 그에 대한 진화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성상이 발이 작은 여자라고 한다면..?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성상이 키가 큰 남자라고 한다면..? 인기 없는 사람들은 자손을 남기지 못할 수 있다. (최초의 자동차를 예로 들자면.. 오토바이가 먼저 나왔다고 따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오스트랄로피데쿠스나 호모 네안데르탈레시스 같은 것들을 증거로 들 수는 있을 것이다. 도구를 사용했는데 여기에서 현생 인류로 진화하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오스트랄로피데쿠스와 현생 인류를 전혀 다른 종으로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인류(우리)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거다. 이러한 논리라면, 인간의 종간 진화를 반대하면서 소진화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동물에서 진화한 것이 아니다 라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아래의 링크는 현생 인류 이전의 인류와 현생 인류 사이의 유전적 유사성을 들어 "우리"를 이전 인류까지 포함시킨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가 있겠지만.. 종간 진화가 아니라 소진화로 볼 여지가 생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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