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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만찬: 나눔의 성사 - 정교회의 관점
    신앙/성례 - 세례와 성찬 2026. 3. 30. 21:24

     

    이번 포스팅은 겐나디오스 리모우리스(Gennadios Limouris) 박사의 논문인 The Eucharist as the Sacrament of Sharing을 바탕으로, 정교회 신학에서 성만찬(Eucharist)이 갖는 다층적 의미를 고찰한다. 성만찬은 단순한 교회 의례를 넘어, '성사 중의 성사(sacrament of sacraments)'로서 교회의 본질을 구성하고 표출하는 핵심 사건이다.

     

    참고로, 한국 기독교인들은 성찬을 개인주의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무엇보다 성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코이노니아와 아가페가 완전히 사라져 있다. 친교와 교제, 사랑이 사라진 성찬(코이노니아)은 그 이름(코이노니아=교제)을 무색하게 한다. 하지만 초대교회 때부터 성찬에서 중요한 점은 다른 지체와의 연합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된 떡을 먹음으로 그리스도의 몸(교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빠진 성찬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것을 잘 모르는 사람은 성찬식 때 아래의 구절을 잘못 해석하곤 한다.

     

    [고전11:27-28]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여기서 성찬을 개인주의적으로 보는 사람은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을 모호하게 해석한다. 그리고 "자기를 살피고"라는 말은, 우리가 죄를 저지르면 또는 우리가 신앙이 없으면 떡과 잔을 먹을 때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이 바로 앞구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고전11:17-22]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가 파당을 나누고, 같이 교제하지도 않고 만찬을 나누지 않는다는 거다. 즉, "자기를 살피고" 라는 말은 옆에서 굶는 사람이 있는데 나 혼자 먹고 마시지 말라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주의 몸과 피, 곧 교회에 죄를 짓는 것이다.

     

    또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고전10:16-17]
    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우리가 떡을 떼어 먹을 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 한 떡, 곧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데, 그리스도의 몸이란 교회이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말이다. (머리 = 그리스도 / 몸 = 교회)

     

    이러한 개념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간혹 만나게 되는데, 워낙 명료한 것이라 따로 설명은 필요없을 거 같다. 내가 성찬에 대한 논문들을 계속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들만 봐도 초대교회 때부터 성찬의 의미가 공동체와 교제, 나눔, 사랑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논문의 주요 통찰은 다음과 같다.

    • 교회론적 중심성: 성만찬은 교회 '안에' 있는 하나의 성사가 아니라, 교회 그 자체를 형성하고 정의하는 중심이다.
    • 나눔과 친교(Koinonia): 성만찬은 '형제의 성사'이자 '가난한 자의 성사'로서, 신자 간의 수평적 나눔과 하나님과의 수직적 연합을 동시에 실현한다.
    • 신화(Theosis): 참여자들은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화(Christified)'되며, 신성에 참여함으로써 영적으로 변모한다.
    • 우주적 및 에큐메니칼 비전: 성만찬은 분열된 세계에서 평화의 원천이 되며, 모든 창조물을 변모시켜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끄는 우주적 사건이다.
    • 에큐메니칼 딜레마: 교회 일치 운동에서 성찬 공유(Intercommunion)는 신앙의 일치가 선행되어야 하는 과제로 남으며, 이는 단순한 상징이 아닌 실질적인 '진리의 대화'를 요구한다.

    I. 교회의 본질과 성만찬의 상관관계

    정교회 신학에서 성만찬은 교회의 존재 이유이자 생명력의 근원이다.

    • 성사 중의 성사 (Teleton Telete): 위(僞) 디오니시오스에 따르면 성만찬은 다른 모든 성사를 인치고 완성하는 최고의 성사다.
    • 교회의 본질 구성: 성만찬은 교회 안에 존재하는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을 구성하고 명시하며 표현한다. 동방 기독교에서 '리투르기(Liturgy, 전례)'라는 단어 자체가 성만찬 예배를 지칭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성령과 자유의 협력(Synergia): 성만찬의 신비는 성령의 사역과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 사이의 협력을 통해 계시된다. 이는 세례받은 각 개인 안에 숨겨진 신성한 생명을 통합하는 과정이다.

    II. '나눔'으로서의 성만찬: 사회적 및 윤리적 차원

    성만찬은 신앙 공동체 내부의 의식을 넘어 사회적 실천과 직결된다.

    1. 형제와 가난한 자를 위한 성사

    •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성만찬적 친교가 '가난한 자의 성사'와 '형제의 성사'를 포함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모든 재화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공동의 복지를 위해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 사회적 활동의 토대: 성만찬은 모든 인류의 질적 단결을 지향하는 사회적 활동의 초월적 지지대가 된다.

    2. 코이노니아(Koinonia)와 연대

    • 수평적 연합: 같은 잔과 빵을 나눔으로써 신자들은 서로 형제자매가 되며, 이는 단순한 감정적 유대를 넘어선 존재론적 일치(Consubstantial)를 의미한다.
    • 공동체적 구원: 기독교인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며, "살아있는 동안 함께 살기에 함께 구원받아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진다.

    III. 신화(Theosis)와 신자의 변모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신자의 존재론적 변화를 수반한다.

    개념 세부 내용 관련 교부/신학자
    그리스도화(Christified) 참여자는 그리스도와 '한 몸과 한 피'가 되어 무적의 힘을 지닌 존재로 변화함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신화(Theosis) 인간이 신성한 에너지에 의해 '신(gods)'이라 불릴 정도로 하느님으로 충만해짐 성 막시무스 고백자
    인성의 고양 성만찬 영성을 통해 인간의 불완전함이 정화되고 지성이 빛나게 됨 예루살렘의 헤지키우스
    형제화(Fraternization) 성찬을 통해 인종, 언어, 문화의 차이를 초월해 하느님의 형상으로 각인됨 성 막시무스 고백자

    IV. 에큐메니칼 관점: 일치와 성찬 공유의 문제

    현대 교회 일치 운동에서 성만찬은 희망인 동시에 도전 과제다.

    • 성찬 공유(Intercommunion)의 딜레마: 신앙의 증거와 성사적 행위를 분리할 경우, 신앙의 가치가 저하되거나 성만찬이 단순한 에큐메니칼 선의의 상징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 교회적 일치의 전제: 정교회 관점에서 교회 일치와 신앙의 충만함은 성만찬의 '조건'이 아니라 성만찬 그 자체의 '내용'이다. 따라서 이를 잠정적으로라도 배제할 수 없다.
    • 사랑의 대화와 진리의 대화: 에큐메니칼 대화는 '사랑의 대화'를 넘어 사도적 신앙의 공통 뿌리로 돌아가는 '진리의 대화'로 나아가야 한다. 성만찬적 환대(Eucharistic hospitality)는 완전한 일치로 가는 길목의 징표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V. 우주적 비전과 평화의 원천

    성만찬은 교회 담장을 넘어 우주 전체의 변모를 지향한다.

    • 우주적 변모(Demiourgia):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주는 영광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성만찬은 이 변모된 창조물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행위다.
    • 분열된 세계의 평화: 성만찬 예배(Anaphora)에서 반복되는 평화의 기도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하나님 및 이웃과의 화해를 위한 근본 조건이다.
    • Affirmation of Life: 죽음으로 운명 지어진 세상에서 성만찬 봉헌은 사탄의 분열된 왕국에 맞서 하느님의 도성을 건설하는 생명의 확증이다.

    주요 인용 (Key Quotes)

    "성만찬은 교회 안에 있는 하나의 성사가 아니라 교회 그 자체의 성사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을 구성하고 명시하며 표현한다." (402쪽)

    "우리는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나누며 성령 안에서 서로 일치한다. 하나님과의 친교는 인간의 영역으로 투사되며, 이것이 바로 '형제의 성사'라고 불리는 것이다." (403쪽, 성 막시무스 고백자 인용)

    "그리스도인은 고립된 개인이 될 수 없으며 타인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도 없다. 인류의 운명과 국가의 운명은 그리스도인에게 무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410쪽)

    "성만찬은 우리 존재 전체를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에 응답하여 봉헌하는 것이다. 죽어가는 세상 속에서 이것은 생명에 대한 긍정이다." (415쪽)

     

    참고로, 얼마 전에 성만찬이 꼭 예배 뒤에 와야 하는가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다. 그런데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성만찬이 그리스도의 희생에 응답하여 봉헌하는 것이라면, 예배(복음 선포) 뒤에 와야만 함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개혁주의에서는 대체로 조직신학에서 사도신경(구속사) 다음에 십계명을 두는데, 복음을 알고 받아들인 사람만이 주님이 주신 은혜로 십계명을 지키게 된다. 곧, 하나님이 먼저 일하시고(복음, 아들의 희생, 구속사), 그에 대한 반응(응답, 감사)으로 인간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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