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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트라스부르의 종교 개혁과 외국인 커뮤니티
    신학 이야기 2024. 7. 28. 09:41

    출처 : https://books.openedition.org/pulg/3824#ftn63

     

    1. 스트라스부르의 종교 개혁 초기

     

    스트라스부르의 종교 개혁은 1524년 대성당의 비카르 티에바우트 슈바르츠가 평신도에게 미사를 집전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기존의 교회 전통과는 다른 혁신적인 시도였으며, 마티유 젤(Mathieu Zell)과 그의 아내 캐서린 슈나이더(Catherine Zell), 그리고 마틴 부서(Martin Bucer) 같은 주요 개혁자들이 개혁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마티유 젤은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의 목사로서, 성경을 중심으로 한 설교와 신앙 교육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아내 캐서린 슈나이더는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며, 많은 신도들에게 영적 위로를 제공했습니다. 마틴 부서는 스트라스부르의 종교 개혁을 체계적으로 추진하며, 교회의 구조와 예배 방식을 개혁했습니다.

     

    1529년, 스트라스부르 시 당국은 공식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를 폐지하고, 개혁된 예배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개혁자들은 교회를 구역으로 나누어 예배와 설교를 진행했으며, 목사는 주교가 아닌 시 당국에 의해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교회의 독립성과 자치권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2. 에클레시아스티컬 콘벤트

     

    스트라스부르의 종교 개혁 초기, 목사들과 그들의 조수들은 에클레시아스티컬 콘벤트(Ecclesiastical Convent)라는 단체를 형성했습니다. 이 단체는 점차 규칙적인 회의를 가지게 되었고, 마틴 부서가 회장을 맡았습니다. 콘벤트는 교회의 운영과 교리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며, 교회의 통일성과 체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마틴 부서의 후임자인 존 마르바흐(John Marbach)는 점점 더 권위적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질서를 강화하고, 종교 개혁의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데 주력했습니다. 마르바흐의 지도 아래, 에클레시아스티컬 콘벤트는 스트라스부르의 종교적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3. 외국인 커뮤니티와 난민 교회

     

    16세기 동안 스트라스부르에는 많은 외국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는 주로 종교적 박해를 피해 스트라스부르로 이주한 난민들에 의해 형성된 것입니다. 스트라스부르는 종교 개혁의 중심지로서 개혁 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피난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 각지에서 다양한 국적과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스트라스부르로 몰려들었습니다.

     

    특히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난민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주로 프랑스, 로렌(Lorraine), 부르고뉴(Burgundy) 등지에서 왔습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난민들은 스트라스부르의 프랑스 교회를 중심으로 모였으며, 이 교회는 그들의 신앙과 공동체 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1538년에 설립된 프랑스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프랑스 교회는 난민들에게 예배와 설교, 신앙 교육을 제공하며, 이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신앙을 유지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1563년 시 당국은 프랑스 교회를 폐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난민들은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신앙을 유지하며, 서로의 신앙 생활을 지지했습니다.

     

    * 1538년, 유명한 종교 개혁자 존 칼빈이 스트라스부르로 이주하여 프랑스 교회를 설립하고,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난민들에게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칼뱅은 프랑스 제네바에서의 어려움을 겪고 스트라스부르로 피신했으며, 여기서 그의 신학적 사상과 개혁 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칼빈은 예배의 구조와 교리 교육을 체계화하여, 난민들이 새로운 환경에서도 신앙을 유지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의 지도 아래, 프랑스 교회는 난민들에게 신앙적 안식처와 공동체를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4. 외국인들에 대한 정책 변화

     

    자크 스툼(Jacques Sturm)의 사망 이후 스트라스부르의 외국인 환영 정책은 점차 변화했습니다. 초기에는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보호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외국인 혐오가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사회적, 경제적 압박과 더불어, 외국인들이 스트라스부르의 자원을 차지한다는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난민들에 대한 제재가 강화되었고, 많은 외국인들이 시민으로 등록되지 못했습니다. 일부 외국인들은 불법 체류자로 간주되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스트라스부르는 초기의 관용 정책에서 벗어나, 점점 더 엄격한 외국인 정책을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5. 주요 난민 그룹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한 주요 난민 그룹은 주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프랑스, 로렌(Lorraine), 부르고뉴(Burgundy) 등지에서 왔으며, 종교적 박해를 피해 스트라스부르로 이주했습니다.

     

    이들 외에도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등지에서 온 난민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스트라스부르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정착하였으며, 각각의 커뮤니티를 형성하여 서로의 신앙과 문화를 유지하며 생활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외국인 커뮤니티는 스트라스부르를 더욱 국제적이고 다문화적인 도시로 만드는 데 기여했습니다.

     

    6. 프랑스 교회의 역할과 기능

     

    프랑스 교회는 난민들에게 다양한 기능을 제공했습니다:

     

    예배와 설교: 프랑스어로 진행되는 예배와 설교는 난민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모국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 생활을 이어가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신앙 교육: 프랑스 교회는 체계적인 신앙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난민들이 개혁 신앙을 깊이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는 칼뱅의 교리 교육과 성경 공부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사회적 지원: 교회는 난민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다양한 사회적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이는 주거지 제공, 일자리 알선, 공동체 활동 등을 포함합니다.

     

     

    7. 프랑스 교회의 폐쇄에 대한 난민들의 대응

     

    1563년, 스트라스부르 시 당국은 프랑스 교회를 폐쇄했습니다. 이는 외국인들에 대한 정책 변화와 관련이 있었으며, 스트라스부르의 외국인 혐오가 확산되면서 난민들에 대한 제재가 강화된 결과였습니다. 프랑스 교회의 폐쇄는 많은 난민들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이들은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비공식 모임: 프랑스 교회가 공식적으로 폐쇄된 이후에도 많은 난민들은 비공식적인 신앙 모임을 조직했습니다. 이들은 가정이나 비밀 장소에서 모여 예배와 성경 공부를 지속했습니다.

    네트워크 형성: 난민들은 서로의 신앙 생활을 지지하기 위해 강력한 네트워크를 형성했습니다. 이들은 정보를 공유하고, 필요한 자원을 서로 제공하며,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했습니다.

    지하 교회 활동: 일부 난민들은 지하 교회를 조직하여 신앙을 지키고, 종교적 박해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은밀히 활동했습니다. 이러한 지하 교회는 스트라스부르의 신앙 공동체가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스트라스부르의 외국인 커뮤니티와 난민 교회는 16세기 동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프랑스 교회의 설립과 칼빈의 지도 아래, 많은 난민들이 신앙을 유지하고 성장할 수 있었으며, 프랑스 교회가 폐쇄된 이후에도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스트라스부르가 종교적 박해로부터 피난처를 제공하는 중요한 도시로 남게 한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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