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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황권에 대한 역사적 논쟁
    신학 이야기 2024. 6. 4. 22:11

    Intro

    내가 가톨릭 신학교에 들어가서 배운 사실 중 가장 놀라웠던 것은, 가톨릭 학자들조차 교황 빅터 이전의 교황에 대해 학술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다는 점이다. 수업 토론 시간에 교수님들이 교황권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취하면서 학생들을 농락하는 모습은 재미있었다. 그러자 분노한 한 신부님이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 교황직은 가짜입니까?

     

    교수님 왈,

     

    나는 베드로부터 교황이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빅터 이전에 교황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없다.

     

    물론 나를 비롯한 개신교인들은 처음부터 교황권에 대해 신뢰하지는 않아서 보통 교황권 논쟁 자체에 크게 관심이 없다. 하지만 양심 있는 가톨릭 학자들 사이에서는 교황 논쟁은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이다. 이건 마치 알미니안 논쟁이나 새관점과 같은 논쟁거리이다.

     


    로마 주교인 빅터 1세 (189-98)에게는 전체 교회 관할권, 즉 교황권이 있었는가?

    교황 빅터 1세

    교황 빅터는 로마 주교가 된 직후부터 교황이었을까? 교황 빅터 1세 (189-199년)는 첫 번째 외국인 교황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로마 제국의 아프리카 속주 출신이었다. 그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첫 번째 교황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부활절 날짜에 관한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자기네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출교시키겠다는 주장이었다. 이게 얼마나 교만하고 바보 같은 짓이었는지, 스스로가 로마 주교로서 전체 기독교를 관할한다고 믿었던 것처럼 처음으로 기록된 로마 주교인 빅터에 대해 후대는 이렇게 평가한다.

     

    Catholic teaching has always acknowledged that popes can make grave mistakes of various kinds when they are not exercising the fullness of their authority in ex cathedra decrees.

     

    Pope Victor redux?

    The Quartodeciman controversy of the second century A.D. had to do with the date on which the resurrection of Christ ought to be observed. ...

    edwardfeser.blogspot.com

     

    사실, 로마를 비롯해서 각 지역에는 주교가 한 사람(단일 주교)보다는 여러 명의 주교가 존재했을 거라고 여겨진다. 로마에도 스스로를 로마 주교라고 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레니우스가 베드로부터 로마 주교 빅토르에 이르는 계보를 정리하면서 빅터에게 로마 주교의 정당성을 주었다.

     

    그리고 빅터 1세 이전까지는 교황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없고, 알렉산드리아 주교처럼 로마 주교라고 불렀다는 기록만 있다. 즉, 로마 주교는 교황이 아니라 많은 주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로마 제국의 수도가 로마이기에 로마 주교의 힘이 강대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증거가 바로 부활절 논쟁이다. 그래서 교황권에 대한 논쟁은 빅터 1세의 부활절 논쟁이 주가 된다.

     


    부활절 논쟁의 시작

    빅터 1세의 짧은 11~12년의 재위 기간(189-199) 동안, 부활절 축일 날짜를 둘러싼 교회 간의 차이는 중대한 논쟁이 되었다. 로마와 일부 동방 교회 간의 관행 차이는 이미 성 이레네우스가 성 폴리카르포스와 교황 성 아니세투스의 만남을 기록한 것에서 증명된 바 있다. 성 폴리카르포스는 부활절 축일을 니산월 14일에 지키는 것을 옳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사십사일제’(quartodeciman) 관행으로 알려져 있다. 둘 중 어느 누구도 서로를 설득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고 로마 주교 성 아니세투스는 성 폴리카르포스가 주일에 성찬례를 집전하는 것을 관용했다. 그것은 서기 154/5년에 있었습니다. 약 11/12년 후, 부활절 날짜를 둘러싼 논쟁은 아시아의 라오디게아에서 아시아 사람들 간에 발생하여 일부는 사십사일제 관행(사르디스의 주교 멜리토)을 옹호하려 했다.

     

    정리하면, 논쟁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소아시아에서, 사도 요한에게서 기원한 교회들은 유대인의 유월절 날짜인 니산월 14일에 부활절을 기념했다. 대부분의 교회는 이 유월절 부활절 관행을 거부했다. 이는 부활절이 평일에 자주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주님의 날인 일요일에 부활절을 기념했으며, 유대인 달력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일요일에 부활절을 지켰다. 여러 교황들은 이러한 상충되는 전례 관행을 묵인했는데, 각 관행이 최소한 한 명 이상의 사도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황 빅터는 교회의 전체 부활절 달력을 통일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아시아 교회들에게 오래된 관행을 포기하고 부활절 일요일 날짜를 따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거부했다.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폴리크라테스라는 주교가 작성한 그들의 응답을 기록했습니다. 그들의 거부 이유는 이것이 사도 요한, 성 폴리카르포스 등으로부터 내려온 끊임없는 관행이라는 것이었다.

     


    이게 왜 교황권에 대한 논쟁이 되는가?

    여기서 가톨릭 내 교황권 논쟁의 핵심은, 로마 주교에게 전체 교회 관할권이 주어졌다면 다른 주교들이 반항할 수 있었겠냐는 거다.

     

    1) 일단, 대부분의 가톨릭 학자들은 그래도 아무튼 다른 주교에게 없었던 권위가 로마 주교에게 있지 않았냐고 주장한다. 한 도시의 주교가 다른 도시를 출교시키겠다는 망언을 할 정도로 권한이 있었지 않얐냐고 말이다.

     

    2) 하지만 정직한 가톨릭 학자들은 여기서 맹점을 발견하고 만다. (로마 제국 수도 로마의 주교라서인지 또는 베드로의 후예라서인지는 증명할 수 없지만) 이 당시 로마 주교에게 강력한 권한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로마 주교의 권위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것인지에 대해 명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로마 주교의 영향력은 인정하더라도, 각 지역별로 (부활절 제도 및 기타 등등에 대해) 알아서 잘 굴러갔다는 거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이 부활절 사건으로 빅터 1세가 처음으로 "내가 로마 교황이다"라며 헤게모니 다툼을 시작했다는 거다. 그 이전에는 로마 주교가 다른 주교를 출교시킬 정도의 영향력이 없었고, 교황이라는 용어도 없었기에 빅터 1세 이전의 교황권에 대해 증명할 수 없다는 거다.

     

    뭐, 핍박 받는 초대교회에, 심지어 바울조차 자기의 사도권을 어떻게든 (자기가 복음을 잘 간직하고 있다며) 변호하려고 했을 정도에,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이 사형 당해서 죽는 와중에 갑자기 정치질을 시작한 로마 주교가 나타난 것이다.

     

    아무튼, 교회가 하나의 일원화된 조직을 갖는 게 필요했기 때문에 로마를 중심으로 뭉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이 부활절 논쟁에서 격발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 결과 로마 교황에게 강력한 권한과 영향력이 주어진 것도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문제는, 빅터 1세 이전에는 로마 주교에게 이 정도까지의 권한은 없었던 것처럼 보이고, 로마를 중심으로 단일화하려는 움직임이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전에는 각자가 가지고 있었던 사도의 유산에 권위를 두었지, (폴리크라테스의 말에 따르면) 사람에게 권위를 두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 갈등이 생겼다는 거다.)

     


     

    부활절 논쟁 - 폴리크라테스의 편지와 그에 대한 응답

    그러면 이제 폴리크라테스의 편지를 살펴보자. 이 편지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특징이 있다.

     

    첫째, 편지에서는 “증인이자 교사였으며, 주님의 가슴에 기대었던 제사장이었던 요한 사도”를 언급한다.

     

    둘째, 이 편지는 사도행전 5:29을 인용하여 교황 빅터의 요구에 응답한다.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해야 합니다.

     

    셋째, 논쟁의 양측은 전통, 즉 사도로부터 현재까지의 끊임없는 관행을 호소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이 다른 사도들과 다른 관행을 제정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논쟁의 양측 모두가 옳은 것처럼 보인다). 교황 빅터 1세만 아니었다면, 우리는 다양한 관습과 그리스도의 몸의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순종과 권위의 충돌, 전례 전통 간의 추한 충돌이 있었다.

     

    교황 빅터는 아시아 주교들의 불복종에 대해 부활절 일요일로 전환하지 않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출교시키는 것으로 응답했다. 다른 주교들은 빅터와 의견을 같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처벌의 가혹함에 놀랐다. 성 이레네우스(부활절 일요일 날짜를 지키고 로마 교황청을 믿는 사람)는 이성적으로 행동하도록 개입한 주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로마 주교 아니클레투스가 이 문제에도 대해 성 폴리카르포스와 교제했음을 지적했다.

     

    이레네우스와 다른 주교들이 발언한 후 출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유세비우스는 단순히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의 기록을 마무리한다.

     

    이렇게 해서 정말로 잘 이름 지어진 이레네우스는 이 문제에서 평화의 중재자가 되어 교회의 평화를 위해 이 문제에 대해 조언하고 협상했습니다. 그는 빅터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다른 교회 지도자들과도 이 논쟁에 대해 서신을 주고받았습니다.

     


    빅터의 결정과 부활절에 대한 이후 이야기

     

    가톨릭 학자들도 인정하듯이, 로마 주교의 권위가 다른 주교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명확하게 기록된 적이 이전에는 없었다.

     

    “교황 빅터 시대(189-199)만큼 이 [우위]가 명확한 시점은 없습니다. ‘갈리아에서 오스로에네 [유프라테스 강]까지’ 그의 부활절 논쟁 해결을 위한 공의회 소집 요청이 모든 곳에서 수용되었습니다. ‘교황 빅터의 단독 주도, 효과적이라는 증거가 된 주도는 고대에 로마 교회의 예외적인 상황과 에큐메니칼 권위를 얼마나 명확히 보여주었는지를 충분히 증명합니다.’” (Dr. Beresford Kidd, The Roman Primacy to AD 461, 18-19쪽)

     

    교황 빅터는 준수의 통일성을 지지하는 운동을 시작합니다. 그의 요청에 따라 기독교 세계 전역에서 동시에 공의회가 열리고, 모두 부활절을 일요일에만 기념해야 한다는 결정을 발표합니다. 오직 아시아 교회들만이 이 결정을 저항합니다. 성 빅터는 ‘그들을 공통의 일치에서 제외하려고’ 합니다. 다른 주교들 중 일부는 이 조치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에페소스 주교는 사도 요한으로부터 받은 전통을 주장했고, 그들은 ‘빅터를 다소 날카롭게 꾸짖었습니다’. 이레네우스는 ‘적절하게’ 빅터에게 단식의 관습 차이가 신앙의 일치를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불완전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교황이 기독교 교회들 간의 일치를 유지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그의 요구에 따라 모든 곳에서 공의회가 소집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가 이전에는 단순히 개인 이단 지도자들을 출교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사도적 기초를 가진 수많은 교회들을 출교시킬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봅니다. 그의 행동은 ‘모든 주교들에게 기쁘지 않았으나’, 많은 주교들이 만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권리를 부정하는 흔적은 없고, 단지 그 권리 행사의 공정성에 대한 이의만 있었습니다.” (Dom John Chapman, Bishop Gore and Catholic Claims, 66-67쪽)

     

    그리고 가톨릭 학자들이 교황 제도가 태어났다는 것을 확인하는 시점 또한 교황 빅터 시대가 처음이다.

     

    빅터는 로마의 주교로서 이레네우스와 동시대 친구였으며, 모든 교회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부활절 논쟁에서의 행동은 이를 충분히 증명합니다. 그의 행동은 이집트에서 아시아에 이르는 모든 동방 교회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부활절 날짜를 통일하는 것을 그의 일로 삼았으며, 레난은 이에 대해 ‘교황제는 이미 태어났고, 잘 태어났다’라고 말할 정도로 충분히 활기찼습니다.” (Monsignor Pierre Battifol, Catholicism and Papacy, 111쪽)

     

    하지만 부활절 문제는 빅터 시대를 지나서도 지속되었다. 즉, 빅터의 결정에 대해 순종하지 않고 반대했던 사람들이 계속 있어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를 공의회(314)에서 주교들은 새로 선출된 교황 실베스터 1세에게 보내는 규칙을 작성했으며, 첫 번째 규칙은 다음과 같.

     

    “첫째로, 주님의 부활절 준수에 관해서는 우리가 전 세계에서 같은 날과 같은 시간에 그것을 준수해야 하며, 당신이 관례에 따라 모든 이에게 편지를 보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아를 공의회는 교황 실베스터가 빅터가 주장한 이 규칙을 모든 교회가 지키지 않고 있는 걸 알았고, 그랬기에 모든 교회가 잘 지키길 원했다. 그 후, 니케아 공의회 (325)는 이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며 공의회 편지의 결론 부분에 다음과 같이 이집트인들에게 보냈다:

     

    “우리는 거룩한 부활절에 관한 문제도 해결되었음을 알리는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동방의 모든 형제들이 이제까지 유대인의 관습을 따랐으나, 이제부터는 로마인들과 여러분, 그리고 우리 모두가 고대부터 함께 지켜온 관습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성공과 공통의 평화와 조화, 모든 이단의 단절에 기뻐하며, 우리의 동료 사역자이자 여러분의 주교인 알렉산더를 더욱 큰 존경과 사랑으로 환영합니다. 그는 우리를 그의 존재로 행복하게 해주었고,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도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니케아 공의회에 이르러서도 부활절의 올바른 날짜에 대해 일치해야 한다고 다시 이야기한 것이다. 그때까지도 로마 주교 또는 교황의 권위로 호소된 부활절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을 볼 수 있다.

     


    정리하며

    가톨릭 학자들은 교황 반대파들이 빅터 교황에 대한 이야기를 교황 이론에 대한 반박의 증거로 사용한다고 말한다. (물론 교황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는 개신교도는 금시초문이다.) 빅터와 아시아 간의 충돌에서 빅터(교황)가 불복종을 당했다는 것이며, 따라서 로마 주교(교황)가 보편 교회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교황권에 대한 이런 논의는 생각보다 활발하며, 심지어 가톨릭 학자들조차 교황 빅터 이전의 교황권에 대해 증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물론 그들은 (역사적 사실이) 기록에 남아있지 않을 뿐이며, 그렇기에 믿음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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