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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간략한 역사
    책 소개 2024. 6. 21. 07:18

    Intro

    이번 포스팅은 Lambert Lamberigts의 Vatican II: A Short History"에 대한 소개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공의회이다. 가톨릭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꾼 공의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가톨릭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중세 시스템에 매몰되어 점점 도태되어 가던 가톨릭이 현대화한 공의회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개신교도라 하더라도 이 책을 읽는다면 현대 가톨릭에 대해 좀더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용

    서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20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묘사된다. 교황 요한 23세가 1959년 1월에 발표한 이 공의회는 현대적 도전에 대응하여 교회의 개혁과 갱신의 필요성을 다루고자 했다. 공의회는 교회 관행을 현대화하고 현대 세계와의 보다 개방적인 대화를 촉진하려고 했다.

     

    역사적 맥락

    공의회는 중대한 정치적 및 사회적 격변의 배경에서 소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은 냉전, 탈식민지화, 새로운 정치 이데올로기의 부상으로 특징지어졌다. 이러한 세계적 사건들은 교회에 영향을 미쳤으며, 교회는 내부 및 외부적으로 변화에 대한 압력을 받았습니다. 공의회는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고 급변하는 세계에서 교회의 위치를 재정립하려고 했습니다.

     

    공의회 준비

    공의회를 준비하는 과정은 광범위했다. 교황 요한 23세는 전 세계 주교들로부터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준비 위원회를 설립했다. 이 개방적이고 포괄적인 접근 방식은 현대 문제에 대응하는 목회적 공의회를 위한 교황의 비전을 반영했다. 초기 회의론과 물류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준비 과정은 광범위하고 다양한 주제를 논의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첫 번째 회기 (1962)

    첫 번째 회기는 교황 요한 23세의 개회사로 시작되었으며, 그는 교회가 시대의 징후에 대응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초기 논의는 전례에 집중되었으며, 사크로산크툼 콘칠리움 문서는 적극적인 참여와 전례에서 모국어 사용을 강조하며 긍정적인 반응을 받았다. 그러나 이 회기는 교회 내의 진보적 및 보수적 파벌 간의 긴장도 드러냈다.

     

    두 번째 회기 (1963)

    교황 요한 23세의 사망 후 교황 바오로 6세가 공의회를 이어가며 에큐메니즘과 종교 자유에 초점을 맞췄다. 논의된 주요 문서로는 루멘 젠티움노스트라 아에타테가 있다. 루멘 젠티움은 교회의 자기 이해를 재정의하며,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강조하고 주교들 간의 공동성을 촉진했다. 노스트라 아에타테는 유대인 및 다른 비기독교 종교와의 관계를 크게 개선하며 반유대주의를 거부하고 종교 간 대화를 촉진했다.

     

    세 번째 회기 (1964)

    세 번째 회기는 계시의 본질과 전통의 역할에 대한 격렬한 논쟁으로 특징지어졌다. 이러한 논의에서 데이 베르붐 문서가 등장했으며, 이는 성경과 전통의 중요성을 균형 있게 다루었다. 또한, 이 회기 동안 “블랙 위크”로 불린 시기에 종교 자유와 유대인 및 비기독교인과의 관계에 대한 격렬한 내부 갈등이 있었다.

     

    네 번째 회기 (1965)

    최종 회기는 현대 세계에서 교회의 사명을 다룬 가우디움 에 스페스와 같은 중요한 문서들에 초점을 맞췄다. 이 문서는 현대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참여, 평신도의 역할, 인간 존엄성과 사회 정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사제들의 사역과 삶에 관한 교령이 논의되었으며, 이는 현대적 맥락에 부응하는 지적 및 목회적 형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주요 문서 및 주제

    루멘 젠티움: 이 교의 헌장은 교회의 자기 이해를 재정의하며, 교회를 위계적 구조가 아닌 공동체적이고 공동적인 존재로 강조했다. 이는 보편적 성화의 부름과 세계에서의 교회의 사명을 강조했다.

    데이 베르붐: 이 교의 헌장은 성경과 전통의 관계를 명확히 하여 성경 해석에 있어 역사적-비평적 방법을 허용했다. 이는 교회 생활에서 성경의 중요성과 신앙의 살아있는 전승으로서의 전통의 역할을 강조했다.

    사크로산크툼 콘칠리움: 이 전례 헌장은 전례 관행을 개혁하여 평신도들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적극적인 참여와 모국어 사용을 촉진했다.

    노스트라 아에타테: 이 선언은 비기독교 종교와의 관계를 다루며 반유대주의를 거부하고 종교 간 대화를 촉진했다.

    가우디움 에트 스페스: 이 목회 헌장은 현대 사회 문제를 다루며, 교회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불안을 세계와 공유하는 사명을 강조했다. 이는 인간 존엄성, 사회 정의, 평화와 연대 촉진에서 교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주요 논쟁과 갈등

    공의회는 교회 내 다양한 관점을 반영하는 중요한 논쟁과 갈등을 목격했다. 주요 논쟁 분야는 다음과 같다.

     

    전례 개혁: 전례 관행, 특히 모국어 사용에 대한 개혁은 전통적인 라틴 전례를 선호하는 일부 사람들의 반대를 마주했다. 그러나 개혁은 더 큰 평신도 참여를 위해 필요하다는 인식 속에 대체로 수용되었다.

    에큐메니즘 및 종교 간 대화: 에큐메니즘 및 종교 간 대화에 대한 논의는 유대인 및 비기독교 종교와의 관계에 대한 논쟁이 특히 치열했다. 노스트라 아에타테는 개방성과 대화로의 중요한 전환을 나타냈지만 일부 저항도 있었다.

    공동성과 권위: 주교들 간의 공동성을 강조하는 개념은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다. 루멘 젠티움은 교황의 중앙 권위와 주교들의 공동 역할을 균형 있게 다루려 했으나 긴장은 남아 있었다.

    종교 자유: 종교 자유 선언인 디그니타티스 후마네는 상대주의와 무관심주의로 이어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반대에 직면했다. 그러나 이는 궁극적으로 승인되어 개인의 종교 자유와 양심의 권리를 인정했다.

     

    영향과 유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에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조르나멘토(갱신)와 현대 세계와의 교류에 대한 강조는 교회의 신학, 전례 및 사회 문제 접근 방식을 변형시켰다. 공의회의 결정은 더 포용적이고 대화적이며 목회적인 교회를 촉진하여 에큐메니즘, 종교 간 대화, 사회 정의를 촉진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유산은 현대 가톨릭 사상과 실천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개혁은 교회 내의 다른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양한 정도로 구현되어, 교회의 사명이 세계에서 동적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정리하며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책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역사에 대한 간략한 내용을 살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여러 가지 생각할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점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전례에서 모국어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가톨릭은 미사 때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고 라틴어를 사용했다. 종교개혁 이후 수백 년을 가톨릭은 그러고 산 것이다. 현대인의 눈으로 봤을 때 참 기가 막힌 일이지만.. 관점을 바꿔보면 더 인상적인 것이 있다.

     

    관점을 바꿔보자. 당시 보수적 파벌들에 대한 입장이다. 개신교에서는 성경을 모국어로 번역하고 예배도 모국어로 드렸다. 하지만 그러한 개혁을 개무시하면서, 반 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을 일으킨 가톨릭에서는 성경의 모국어 번역도, 모국어 예배도 반대해왔다. 그런데 갑자기 모국어 예배가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이후의 가톨릭을 루터를 따라했다며 비판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의 입장을 좀더 생각해보자. 종교개혁 초기에, 그리고 그 이전에 성경 번역 했다가 화형당하고 죽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성경 번역과 모국어 예배를 그렇게 심각하게 비판했던 가톨릭 교회가 느닷없이 모국어 예배와 모국어 성경을 가져온 것이다. 그렇다면 모국어 예배와 모국어 성경을 반대했던 선배들은 뭐가 되는가?

     

    (비슷한 내용으로.. 우리나라 가톨릭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이다. 조상에게 제사지내지 않았다가 죽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제사는 우상숭배라는 교황청의 가르침에 1만의 가톨릭 교도가 제사를 피했고, 그로 인해 박해 가운데 죽었다. 그런데 200년 뒤에 갑자기 "제사 지내도 괜찮아"라고 태도를 바꾼 거다. 그러니까 제사 안 지낸다고 순교한 가톨릭 교도들은 개죽음을 당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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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오늘은 드디어 이스탄불에서 아시아나 비행기를 타고 인천으로 가는 날이다. 새벽에 아잔 소리에 잠이 깨었다. 하루에 5번 빠지지 않고 기도하면 누구나 독실한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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