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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예배의 재구성책&논문 소개 2025. 12. 19. 09:28
이번 포스팅은 폴 브래드쇼(Paul F. Bradshaw)의 저서 『초기 기독교 예배의 재구성(Reconstructing Early Christian Worship)』에 제시된 핵심 주장과 분석을 종합한 브리핑 것이다. 이 연구는 기존의 통설에 도전하며, 비판적 방법론을 통해 초기 기독교 예배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드러낸다. 저자는 초기 예배가 단선적으로 발전했다는 관점을 거부하고, 여러 독립적인 전통이 병존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주장한다.
문서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성찬의 기원에 대한 재해석: 성찬이 최후의 만찬에서 기원했다는 전통적인 시각은 보편적이지 않았으며, 예수의 기적적 식사 사건(요한복음 6장)과 연관된 또 다른 초기 전통이 존재했음을 논증한다. 이로 인해 성찬의 신학적 초점은 '영적 양식'에서 '희생 제사'로 점차 이동했다.
2. 영성체 관습의 사회적 뿌리: 초기 영성체 관습(성찬을 결석자에게 보내거나 집으로 가져가는 것)은 가난한 신자들을 매일 먹여야 했던 실제적인 필요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4세기에 영성체를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은 단순히 개인의 죄의식 때문만이 아니라, 복합적인 사회·문화적 요인이 작용한 결과였다.
3. 세례 전례의 발전 과정: 초기 세례 준비 과정은 윤리적 가르침과 교리적 가르침이 구분되는 2단계로 이루어졌으며, '복음'은 최종 단계에 이르러서야 공개되었다. 또한, 세례 시의 신앙 고백은 본래 교리적 동의가 아닌, 사탄에서 그리스도에게로 소속을 옮기는 개인적·계약적 서약의 성격이 강했다.
4. 일일 기도와 시편 사용의 변천: 초기 기독교의 일일 기도는 4세기에 등장한 '대성당 기도'와 '수도원 기도'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 최소 네 가지의 다양한 패턴으로 존재했다. 시편의 역할 또한 시대에 따라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영성 수련을 위한 묵상', '찬미가', '찬양 행위 자체', 나아가 '보속'과 '전구'의 수단으로 끊임없이 변화했다.
결론적으로, 본 연구는 초기 기독교 예배가 통일된 형태가 아닌, 다양한 지역적·신학적 배경 속에서 유동적으로 발전해 온 복합적인 현상이었음을 강조한다. 이는 과거를 현대 예배의 선례로 삼고자 할 때, 단순한 복원이 아닌 비판적이고 신중한 접근이 필요함을 시사한다.I. 서론: 초기 기독교 예배의 재구성
이 연구의 목적은 초기 기독교 예배의 역사적 정보의 한계와 기존 연구의 가정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통념으로 굳어진 그림 이면에 있는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과거를 재구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예배 실천을 위한 선례로서 과거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촉구한다. 각 장은 특정 주제에 대한 기존의 통상적인 묘사에서 시작하여, 1차 자료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평가함으로써 새로운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II. 성찬 (Eucharist)
1. 성찬 제정의 기원: 최후의 만찬인가, 기적적 식사인가?
브래드쇼에 따르면 통념과 달리,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성찬을 제정했다는 설명은 초기 기독교의 유일하거나 보편적인 전통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러 증거는 이와 다른 독립적인 전통의 존재를 시사한다.
- 요한복음의 증언: 요한복음은 최후의 만찬에서 성찬 제정 기사를 생략하고, 대신 6장에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연결하여 "내가 줄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나의 살이다"라는 말씀을 제시한다. 이는 예수의 말씀이 최후의 만찬이 아닌 기적적 식사 맥락에 있었던 원초적 전통을 반영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이냐시오, 유스티노) 역시 성찬을 '몸'이 아닌 '살(flesh)'로 언급하는데, 이는 요한복음의 전통과 친연성을 보인다.
- 초기 문헌의 증거:
- 디다케: 9-10장에 나오는 성찬 기도는 최후의 만찬이나 예수의 죽음과 전혀 연결되지 않으며, 오히려 생명과 지식을 주신 것에 감사하는 요한복음적 주제가 두드러진다. 특히 빵을 지칭할 때 일반적인 '빵(artos)'이 아닌 '조각(klasma)'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복음서의 기적적 식사 이야기에서만 나타나는 표현이다.
- 안디옥 이냐시오와 유스티노 순교자: 2세기 초 이냐시오와 중반의 유스티노는 성찬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묘사하며, 이는 공관복음이나 바울 서신보다 요한복음의 전통에 더 가깝다. 유스티노는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지만, 그 맥락은 최후의 만찬이 아니며 빵을 '떼는' 행위에 대한 언급도 없다. 이는 복음서 본문과 독립된 구전 혹은 어록집에 근거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 공관복음의 '이중 가닥' 구조: 공관복음의 최후의 만찬 기사는 원래 독립적이었던 두 가지 전통, 즉 종말론적 유월절 식사(포도주를 다시 마시지 않겠다는 선언)와 성찬 제정 말씀이 후대에 결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마가복음 14장에서 "그들이 먹고 있을 때"라는 구절이 반복되고, 제자들이 해석의 말씀을 듣기 전에 잔을 마시는 어색한 순서는 두 이야기가 합쳐졌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 신학적 초점의 이동: 초기에는 성찬이 생명을 주는 '영적 양식'으로 이해되었으나, 3세기에 이르러 키프리안과 같은 저술가들이 신약성경의 권위에 의존하여 성찬을 예수의 희생적 죽음과 명확히 연결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성찬의 신학적 강조점은 양육(nourishment)에서 희생(sacrifice)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참고로 나는 이런 주장에 설득되지 않는다. 물론, 성찬의 근거가 유월절 사건과 광야 시대의 만나 사건, 그것과 연결된 십자가와 오병이어 사건과 연결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굳이 최후의 만찬 기사가 후대에 결합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
2. 성찬(영성체) 관습의 변천: 가난한 자를 위한 식사에서 개인의 영적 양식으로
초기 교회의 영성체 관습은 단순한 상징 행위를 넘어 공동체의 실제적 필요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 영성체의 사회적 뿌리: 2세기 유스티노가 언급한 결석자에게 성찬을 보내는 관습이나, 테르툴리아누스가 언급한 신자들이 성찬 빵을 집으로 가져가 주중에 먹는 관습은 박해 시기 잦은 영성체를 위한 열망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공동체 내 가난한 이들의 배고픔을 매일 해결해 주어야 했던 필요성에서 출발했을 수 있다. 초기 성찬 식사는 부유한 신자가 가난한 신자를 먹이는 '사랑(agape)'의 실천적 표현이었다.
- 영성체 빈도의 증가: 초기에는 주일(혹은 토요일 저녁)에 행해지던 성찬이 3세기 북아프리카에서는 수요일과 금요일에도 배부되었고, 박해 시기에는 매일 거행되기도 했다. 4세기에 이르면, 특히 사막의 수도자들과 로마 및 스페인 지역 교회에서 매일 영성체를 하는 관습이 널리 퍼졌다.
- 영성체 기피 현상: 4세기에 이르면 많은 신자들이, 심지어 사막의 수도자들 중 일부까지도, 일 년에 한두 번만 영성체하는 등 장기간 성찬을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 이는 요한 크리소스톰과 같은 설교가들이 영성체에 필요한 양심의 순결함을 지나치게 강조했기 때문이라는 통설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의 설교는 이미 영성체를 기피하던 이들이 간혹 성찬에 참여할 때조차 합당하지 않음을 지적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 장기간의 기피 현상은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일부 신자들의 헌신 부족, 급증한 새 신자들이 매주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정결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점, 수도원 운동에서 강조된 인간의 죄성에 대한 고조된 인식, 그리고 주일에는 참회 기도를 위한 무릎 꿇기가 금지되어 성찬 직전에 자신을 정화할 방법이 없었던 점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 '영성체 중심적' 신심: 이러한 관습들의 누적된 효과는 평신도들의 신심이 성찬을 '함께 봉헌하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먹는 행위' 자체에 더 초점을 맞추는 '영성체 중심적 신심(communion-centered piety)'을 형성했음을 시사한다. 이는 성찬 거행(축성)과 영성체가 분리되는 현상으로 이어졌으며, 로마에서는 5세기에 교황이 축성한 빵을 다른 성당에 보내 말씀의 전례 후 나누어주는 관습(Fermentum)이 나타나기도 했다.
3. 초기 성찬 기도문의 재검토: 디다케와 사도 전승
전통적으로 초기 성찬 기도의 원형으로 여겨져 온 두 문헌, 즉 『디다케』와 소위 히폴리투스의 『사도 전승』은 비판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 디다케 9-10장: 이 두 장은 하나의 성찬 식사의 전후 순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뿌리에서 파생된 두 개의 평행하고 대안적인 전례문일 가능성이 크다. 편집자가 원래 독립적으로 구전되던 기도문들을 입수하여 '식사 전'(9장)과 '식사 후'(10장)라는 인위적인 틀에 맞추어 배열했다는 것이다.
- 이 가설은 두 기도문의 내용과 구조가 거의 중복되는 문제, 식사가 끝난 후(10.1)에 영성체 초대가 나오는(10.6) 모순 등을 해결해 준다.
- 이는 성찬 기도가 '잔과 빵에 대한 개별 기도'(9장)에서 '둘을 아우르는 단일 기도'(10장)로 발전하는 초기 단계를 엿보게 한다.
- 소위 히폴리투스의 『사도 전승』: 이 문헌은 3세기 초 로마의 히폴리투스가 쓴 단일 저작이 아니라, 2세기 중반부터 4세기 중반에 걸쳐 여러 지역의 다양한 자료들이 집합된 복합적인 문헌이다.
- 이 안에 담긴 유명한 성찬 기도는 원본의 일부가 아니라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 이 기도문은 '하느님의 자녀(child)' 예수, '당신 뜻의 천사'와 같은 2세기 초반의 고대 어휘와, 제도어(institution narrative)나 발전된 형태의 성령 청원 기도(epiclesis) 같은 4세기 중반 이후의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 이는 이 기도문이 4세기 중반경, 로마가 아닌 서부 시리아 지역에서 최종 형태를 갖추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를 3세기 초 로마의 보편적인 성찬 기도 모델로 삼는 것은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
III. 세례 (Baptism)
1. 세례 후보자와 복음: 유보된 가르침의 증거
일반적으로 세례 후보자들이 신자들과 함께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성경 봉독과 설교를 들었을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초기 교회 일부에서는 핵심적인 가르침을 세례 직전까지 유보하는 관습이 존재했다.
- 2단계 세례 준비 과정: 『디다스칼리아 아포스톨로룸』과 『사도 전승』의 가장 오래된 층은 세례 준비가 2단계로 이루어졌음을 암시한다.
- 1단계: 윤리적 가르침과 생활 방식에 대한 훈련.
- 2단계: 후보자의 생활 방식에 대한 심사(『사도 전승』)나 신앙 고백(『디다스칼리아』)을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복음'을 들을 자격이 주어졌다.
- 이는 세례 후보자들이 정기적으로 복음서가 봉독되는 공적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 후대 전례에 남은 흔적: 이 관습의 흔적은 4세기 이후 여러 지역의 전례에 남아 있다.
- 시리아: 요한 크리소스톰은 세례 전날에 서약식이 있었음을 언급하는데, 이는 원래 가르침을 위한 시간적 간격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 밀라노: 암브로스가 언급한 '에페타(Effeta, 열려라)' 예식은 본래 귀를 열어 유보되었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목적이었을 수 있다.
- 로마: 로마 전례의 '귀를 여는 예식(Apertio aurium)'과 특정 주일에 세례 후보자들을 복음 봉독 전에 퇴장시키는 관습은 과거에 복음 듣기가 제한되었던 전통의 유산일 수 있다.
- 갈리아와 스페인: 5-6세기 지역 공의회에서 "세례 후보자들에게 복음을 읽어주어야 한다"고 규정한 것은, 그 반대의 관습이 일부 교회에 여전히 남아 있었음을 방증한다.
- 변화의 원인: 이러한 유보된 가르침은 점차 사순 시기가 보편화되면서 변화했다. 세례 최종 준비 기간이 3주에서 40일로 늘어나면서, 기존의 윤리적 가르침이 이 기간으로 편입되었고, 두 단계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핵심적인 교리 교육은 세례 후에 그 의미를 설명하는 '신비 교육(mystagogy)'으로 전환되었다.
2. 신앙 고백의 본질 변화: 개인적 서약에서 교리적 동의로
초기 세례에서의 신앙 고백은 오늘날과 같이 교리적 내용을 인지하고 동의하는 행위라기보다는, 소속과 충성을 바꾸는 계약 행위의 성격이 강했다.
- 두 가지 초기 형태:
- 동방(시리아) 전통: "나는 당신을 끊어 버립니다, 사탄... 그리고 그리스도여, 나는 당신과 결합합니다"와 같은 직설적 선언(indicative statement) 형태를 취했다. 이는 주인을 바꾸는 계약이자 영적 군대에 입대하는 서약이었다.
- 서방(로마-아프리카) 전통: "당신은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믿습니다"라고 답하는 질의응답(interrogatory) 형식을 사용했다. 이는 당시 로마법에서 계약을 체결하던 방식(stipulatio)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이 역시 삼위일체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행위였다.
- 교리적 내용의 첨가와 본질의 변화: 시간이 흐르면서 이 간결한 서약에 점차 신조적 내용이 덧붙여졌다.
- 동방에서는 서약문에 완전한 형태의 신조가 첨부되었고, 서방에서는 삼위일체에 대한 질문에 교회, 죄의 용서, 육신의 부활 등의 항목이 추가되었다.
- 이러한 변화는 신앙 고백의 본질을 '개인적 헌신 행위'에서 '교리 내용에 대한 동의'로 바꾸어 놓았다.
- 유아 세례에 미친 영향: 이러한 본질의 변화는 유아 세례 관습에 신학적 어려움을 야기했다.
- 원래의 계약적 의미하에서는 부모나 후견인이 로마법에서처럼 유아를 대신하여 계약(sponsio)을 맺어줄 수 있었다. 터툴리안은 이들을 '대부모(sponsors)'라고 부른다.
- 그러나 신앙 고백이 '믿음의 내용에 대한 동의'로 이해되면서, 지적 동의가 불가능한 유아를 어떻게 세례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유아가 직접 믿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성사를 통해" 교회의 믿음 안에서 신자가 된다는 신학적 해답을 제시했다.
3. 세례 도유의 다양성: 통일성 없는 관습들
세례 시의 기름 바름(도유)은 초기 기독교에서 통일된 하나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위치, 형태, 의미가 매우 다양했다.
- 초기 증거의 다양성:
- 도유의 부재: 『디다케』와 유스티노 순교자의 기록 등 가장 오래된 일부 자료에서는 세례 시 도유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 시리아의 다양한 전통: 『도마행전』은 머리에만 기름을 붓는 경우(메시아적 의미), 온몸에 바르는 경우(치유의 의미), 물 없이 기름만 사용하는 경우 등 다양한 형태의 입교식을 묘사한다. 이는 단일한 발전 과정이 아닌, 여러 평행한 전통이 공존했음을 시사한다.
- 서방의 후-세례 도유: 터툴리안와 키프리안(북아프리카)는 물세례 '후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관습을 증언하며, 이를 구약의 사제직 수임과 연결한다.
- 4세기 이후의 복잡한 발전:
- 『사도 전승』의 복합적 형태: 이 문헌은 세례 전 '구마의 기름' 도유와 세례 후 '감사의 기름' 도유(온몸과 머리)를 모두 포함하는데, 이는 여러 다른 전통이 합쳐진 결과로 보인다.
- 지역별 차이 지속: 4세기에도 통일성은 나타나지 않는다.
- 안디옥(크리소스톰): 세례 전 머리와 온몸에 두 번 도유하며, 주로 악마에 대한 보호(운동선수 비유)로 해석한다.
- 예루살렘: 세례 전 온몸 도유(구마, 올리브 나무에 접붙임)와 세례 후 이마, 귀, 코, 가슴에 도유(성령 부여)를 행했다. 이 독특한 형태는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 이집트: 세례 전후 도유가 모두 나타나며, 특히 예루살렘과 유사하게 몸의 여러 부분에 기름을 바르는 관습이 보인다.
- 서방: 밀라노에서는 세례 전 온몸 도유가, 로마에서는 세례 후 이중 도유가 나타나는 등 지역별 차이가 컸다.
결론적으로, 세례 도유는 단일한 기원이나 의미를 갖는 예식이 아니라, 각 지역 교회가 고유한 신학적 해석과 함께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시킨 복합적인 관습이었다.
IV. 기도 (Prayer)
1. 초기 일일 기도의 네 가지 패턴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성당 기도'와 '수도원 기도'라는 이분법은 초기 기독교의 다양한 기도 생활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실제로는 최소 네 가지 뚜렷한 패턴이 존재했다.
1. 4세기 이전의 기도 (개인/가족 기도):- 하루 3번(3시, 6시, 9시) 혹은 5번(아침, 저녁 추가) 기도했으며, 한밤중 기도도 있었다.
- 이는 개인이나 가족 단위의 소그룹으로 드리는 비공식적 기도였으며, 시편 낭송이나 성경 봉독이 포함되지 않았다.
- 핵심은 세상 전체를 위한 찬양과 중보기도였으며, 모든 신자가 교회의 '왕 같은 사제직'을 수행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2. 4세기 '대성당 기도' (공동체 기도):-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후 가능해진 공개적이고 공동체적인 아침, 저녁 기도를 의미한다.
- 사제단이 주도하고 회중이 참여하는 계층적 구조를 가졌다.
- 선별된 시편(아침: 148-150편, 저녁: 141편)을 후렴구를 붙여 노래하는 방식이 특징이었다.
- 기도의 빈도는 줄었지만, 공동체적 표현은 강화되었다.
3. 사막 수도자들의 기도 (영성 수련):-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명령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려는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 개인적인 영적 성장을 목표로, 시편 전체(150편)를 순서대로 암송하며 묵상하는 방식이었다.
- 이는 공동체를 위한 도고기도가 아닌, 개인의 구원과 완성을 위한 개인주의적이고 내향적인 기도였다. 이는 초기 기독교의 기도 정신에서 급진적으로 벗어난 형태였다.
4. 도시 금욕주의자들의 기도 (전통의 보존):- 사막으로 가지 않고 도시에 남은 경건한 신자들의 기도 패턴이다.
- 이들은 4세기 이전의 하루 여러 차례 기도하는 전통을 보수적으로 계승했다.
- 하지만 사막 수도자들의 영향을 받아 밤샘 기도나 개인의 영적 성장을 위한 기도 등 수도원적 요소도 일부 받아들였다.
2. 시편의 역할 변화: 예언에서 찬미와 보속으로
시편은 초기 기독교 예배에서 고정된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시대와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그 기능과 의미가 끊임없이 변화했다.
- 예언으로서의 시편: 신약성경에서 시편은 주로 다윗이 성령의 영감으로 쓴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서로 인용되었다. 이 관점은 교부 시대에도 이어져, 시편을 그리스도의 목소리,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으로 해석하는 Christological 해석법의 기초가 되었다.
- 성경의 요약으로서의 시편: 4세기 사막 수도자들은 시편을 모든 성경의 가르침을 포괄하는 영적 훈련의 핵심 교재로 삼았다. 시편을 묵상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고 자신을 훈련하고자 했다.
- 찬미가로서의 시편: '대성당 기도'에서는 선별된 시편(주로 찬양 시편)이 선창자가 한 절씩 부르면 회중이 후렴구로 응답하는 응답송(responsorial psalmody) 형태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시편 자체는 '낭독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회중의 후렴구는 그에 대한 '찬미의 응답'으로 기능했다.
- 찬양 행위 자체로서의 시편: 도시 수도원 전통에서 사막의 '시편 전체 낭송'과 대성당의 '음악적 찬미가' 전통이 결합하면서, 시편의 내용과 상관없이 시편을 노래하는 행위 자체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찬양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는 시편 전체가 전례 안에서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 보속과 전구로서의 시편: 후대에 이르러 시편 낭송은 다른 고행을 대신하는 보속 행위(켈트 수도원 전통)로, 혹은 죽은 이를 위해 바치는 전구 기도(장례 예식)의 수단으로까지 그 역할이 확장되었다.
3. 참회 기도의 출현: 개인적 경건에서 전례적 요소로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이 개인의 죄에 대한 참회의 필요성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전례 안에 참회 기도가 포함되는 것은 매우 더딘 과정이었다.
- 초기 전례에서의 부재: 초기 기독교의 일일 기도와 성찬 전례는 거의 전적으로 찬양과 중보기도에 초점을 맞추었다. 3세기 저술가들이 개인적인 참회 기도를 권장했지만, 4세기 '대성당 기도'의 형식에는 참회 요소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 수도원 운동의 영향: 전례에 참회적 성격이 도입된 것은 수도원 운동의 영향이 컸다.
- 도시의 금욕주의자들은 하루의 시작(자정 이후 또는 새벽)에 참회 시편인 시편 51편을 낭송하는 관습을 발전시켰다. 이 관습은 카파도키아 지역에서 시작되어 점차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저녁 기도에서는 저녁 제사를 죄를 속죄하는 제사로 이해하면서 참회적 요소가 추가되기도 했다.
- 도시의 금욕주의자들은 하루의 시작(자정 이후 또는 새벽)에 참회 시편인 시편 51편을 낭송하는 관습을 발전시켰다. 이 관습은 카파도키아 지역에서 시작되어 점차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 성찬 전례에서의 더딘 발전: 성찬 전례에서 참회 기도의 등장은 더욱 늦었다.
- 이는 성찬이 거행되던 주일에는 무릎 꿇기와 같은 참회 행위가 금지되었던 고대 관습 때문일 수 있다. 성찬 전에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을 공식적인 기회가 없었던 것이 평신도들이 영성체를 장기간 기피하는 한 원인이었을 수 있다.
- 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일부 지역에서 성찬 기도 후에 주님의 기도가 포함되기 시작했으나, 본격적인 참회 예식은 9-10세기에 이르러서야 사제들의 개인적인 준비 기도 형태로 등장했다.
결론적으로, 초기 기독교 예배에서 참회는 개인의 경건 영역에 속한 것이었으며, 그것이 공동체의 공식 전례 안으로 들어와 보편적인 요소가 되기까지는 수 세기에 걸친 점진적인 발전 과정이 필요했다.'책&논문 소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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