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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주의적 유신론, 인본주의적 자유주의 유신론, 그리고 종교적 인본주의신앙/신학 이야기 2026. 1. 5. 16:51

이번 포스팅은 윌리엄 R. 존스(William R. Jones)의 글 Theism and Religious Humanism: The Chasm Narrows을 바탕으로, 종교적 인본주의와 현대 유신론, 특히 "인간중심적 유신론(humanocentric theism)" 사이의 간극이 좁혀지고 있음을 분석한다. 존스는 현대 신학이 인본주의의 핵심 원리인 "기능적 궁극성(functional ultimacy)", 즉 인간의 급진적 자유와 자율성을 점차 수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언젠가 어떤 교수가 신본주의는 없다고 주장하는데, 윌리엄 존스가 말하는 유신론이 신본주의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유신론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견지해온 입장이며, 유신론에 반대되는 세계관이 인본주의 세계관이다. 그러나 유신론과 인본주의 사이에 종교적 인본주의가 나타나게 된다. 존스 교수는 기독교 유신론(나름 신본주의)와 구분되는 종교적 인본주의를 언급한다. 즉, 우리는 1977년에 게재된 이 글에서 1977년에도 종교적 인본주의와 유신론(신본주의) 사이에 구분이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무엇보다, 새롭게 등장한 인본주의적 유신론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이 얼마나 종교적 인본주의와 구분이 되는지 설명하는데, 곧, 여기서 우리는 인본주의적 유신론을 포함한 신본주의가 종교적 인본주의를 포함한 인본주의 사이와 어떻게 구분되는지 알 수 있다.
2024.03.15 - [신앙/말씀 믿음 삶] - 신본주의는 없다?
사실 서양 사상사를 조금만 공부했다면, 서양의 사상이 헤브라이즘(신본주의/유신론)과 헬레니즘(인본주의)으로 구분됨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기독교 유신론 안에 인본주의적 요소들이 있다면서 인본주의와 유신론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존스조차 또한 종교적 인본주의와 인본주의적 유신론 사이의 간극이 좁혀진다고 말한다. 곧, 종교적 인본주의와 유신론(신본주의) 사이에 간극이 존재함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알아야 할 사실은, 신본주의 유신론과 인본주의 유신론 사이의 차이를 인본주의 유신론과 종교적 인본주의 사이의 차이보다 더 크게 본다는 점이다. 즉, 신본주의가 없다는 주장은 신본주의에 대해 전제하고 있는 글들을 조금이라도 살펴보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소리다.
신본주의적 유신론의 정통 신학 >>> 인본주의적 유신론의 자유주의 신학 > 종교적 인본주의
물론, 여기서 우리는 종교적 인본주의보다 한참 더 오른쪽에 무신론적 인본주의를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존스가 다루고 있는 것은 그나마 인본주의 중에서도 종교성이 있는 개념들만 다룬 것이다.
참고로, 존스에 따르면 종교적 인본주의는 반종교적 입장이 아니라, 인간을 종교적 존재(homo religiosus)로 인정하되 종교를 유신론적 경험에 국한시키지 않는 대안적 종교 및 구원론 체계로 제시된다. 역사적으로 종교적 인본주의는 주류 유신론에 가려지고, 체계적인 신학의 부재와 지배적인 인본주의 문화의 부재로 인해 비판받아왔다.
존스의 핵심 주장은 유신론과 인본주의의 근본적인 차이가 인간의 자유를 긍정하느냐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차이는 ▲기능적 궁극성의 적용 범위와 위상 ▲구원론에 대한 상이한 개념 ▲궁극적 실재의 본질적 선함에 대한 서로 다른 가정에서 비롯된다. 인본주의는 궁극적 실재의 선함이 자명하지 않다고 보며, 이것이 신정론(theodicy) 문제가 인본주의자들에게 영원한 걸림돌이 되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존스는 해방 신학, 페미니스트 신학 등 현대 신학의 여러 도전 과제들이 유신론을 더욱 인간중심적 입장으로 이끌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 과정에서 진정한 신학적 단층선은 종교적 인본주의와 인간중심적 유신론 사이가 아니라, 유신론 내의 인간중심적 분파와 전통적인 신중심적(theocentric) 분파 사이에 있음이 드러날 것이라고 전망한다.
서론: 신학적 불확실성의 시대와 종교적 인본주의
현재의 신학적 풍토는 심오한 불안과 교리적 불확실성 속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탐구의 시기로 특징지어진다. 기존의 제한된 선택지를 다듬거나 광범위한 합의 모델을 구축하기보다는, 미지의 신학적 지형을 탐사하며 새로운 통찰을 찾아야 하는 시기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존스는 새로운 버전의 종교적 인본주의를 "신학 시장"에 제시한다. 이는 신학이라는 좁은 범주를 넘어 '종교' 사상의 새로운 전환점을 모색하는 흐름의 일환이며, 비유신론적 관점이 교회의 자기 명료화 과제에 기여할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다. 종교적 인본주의는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직접적인 경쟁자로서, 그리고 복음이 선포되어야 할 문화적 모체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서 마주하게 될 주요한 종교적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종교적 인본주의의 역사적 도전 과제
종교적 인본주의는 서구 사상에서 기독교 및 비기독교 유신론이라는 주류 전통에 비해 소수 전통에 머물러 왔다. 이 관점이 진정성 있고 필수적인 종교적 시각으로 자리 잡지 못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 주류 유신론의 영향: 거대하고 확고하게 자리 잡은 유신론의 그늘에 가려져 왔다.
- 적대적 이미지: 종교 전반을 말살하고 특히 기독교 유신론을 처단하려는 적대적 세력으로 간주되었다.
- 체계적 신학의 부재: 종교적 인본주의는 아직 그 내적 논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할 '바르트(Barth)'와 같은 사상가를 찾지 못했다.
- 구체적 문화의 부재: 서구 역사상 인본주의가 지배적이었던 구체적인 문화나 시대가 없었다. 찰스 하츠혼(Charles Hartshorne)과 같은 주요 비판가들은 이를 근거로 인본주의가 지속 가능한 사회 시스템의 기반이 될 수 없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 개념적 오해: 종교와 유신론을 동일시하는 논점 선취적 정의와 인본주의의 규범적 원리에 대한 광범위한 오해가 인본주의와 현대 유신론 사이의 근본적인 유사성을 가리고 있다.
종교적 인본주의의 핵심: 기능적 궁극성
정의 및 의의
종교적 인본주의의 핵심 주장은 인간의 기능적 궁극성(functional ultimacy)이다. 이는 인간의 급진적인 자유와 자율성을 의미하며, 인본주의의 윤리학과 인식론을 구축하는 유일한 인류학적 토대이다.
- 이 개념은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격언의 문자적 의미와 상통한다.
- 키르케고르의 '진리는 주체성'이라는 원리를 윤리-종교적 영역 너머로 급진적으로 확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윌리엄 제임스의 "믿으려는 의지(will to believe)"나 파이힝거(Vaihinger)의 "마치 ~처럼(as if)" 철학과도 유사점을 갖는다.
존재론적 궁극성과의 구별
비판가들은 종교적 인본주의가 인간을 유한한 자유가 아닌 절대적 자유를 가진 존재, 즉 기능적으로만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ontologically) 궁극적인 존재로 규정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중대한 오해이다.
- 종교적 인본주의는 인간의 존재론적 궁극성을 주장하지 않는다. 인본주의 세계관에서 인간의 자유는 유한하며, 심지어 피조된 자유이다.
-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을 만물의 '척도'라고 한 것은, 인간이 역사의 통제자가 아니라 궁극적인 가치 평가자(valuator)임을 강조한 것이다.
- 사르트르의 오레스테스나 카뮈의 시시포스는 인간의 존재론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강력한 초월적 실재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인정한다. 그들이 긍정하는 것은 신의 권능이 아니라 신의 선함(benevolence)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인간의 가치 평가와 선택이 최종적인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인본주의적 유신론: 신학 내의 변화
존스는 현대 신학자들 사이에서 인간의 급진적 창조성을 수용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러한 신학자들을 "인본주의적 유신론자(humanocentric theists)"라고 부르며, 이들은 급진적 인간 자유에 유신론적 기반을 부여한다.
- 윌리엄 대니얼 코브 (William Daniel Cobb): "도덕적 창조자로서의 인간"을 주장하며, 신이 인간에게 "로봇"이나 "꼭두각시" 이상의 존재가 될 "공간"을 주기 위해 자신의 권능을 스스로 제한했다고 말한다.
- 엘리에제르 베르코비츠 (Eliezer Berkovits): 인간만이 가치를 창조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신 자신이 인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은 인간이 자유를 그릇되게 사용할 때마다 개입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의 자유는 역사를 공동으로 결정하는 힘으로 격상되며, 한때 신의 영역이었던 가치와 역사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된다. 이는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무(無)이다"라는 사르트르의 가설을 반박한다.
종교적 인본주의와 인본주의적 유신론의 주요 차이점
두 관점은 인간의 급진적 자유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현상학적 관점에서 세 가지 주요한 차이점을 보인다.
구분 종교적 인본주의 인본주의적 유신론 기능적 궁극성의범위와 위상 명시적이고 보편적인 규범이다. 가치, 역사, 구원론 등 전 영역에 급진적으로 적용된다. 신, 그리스도, 성서 등이 명시적 규범이며, 기능적 궁극성은 암묵적이거나 제한적으로 적용된다. 구원론(Soteriology) 궁극적 실재의 선함이 불확실할 경우, 그에 대한 반역(프로메테우스처럼)이 구원론적으로 진정한 행위일 수 있다. 구원은 궁극적 실재, 즉 신의 뜻에 순응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아담의 반역은 죄의 본질이다. 궁극적 실재에대한 관점 궁극적 실재가 본질적으로 선하거나 인류에게 호의적이라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 보지 않는다. 신의 사랑(agape)조차 악의로 해석될 수 있는 다중증거성(multievidentiality)을 인정한다. 궁극적 실재가 본질적으로 도덕적이고 선하며, 인류의 최고선을 지지한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차이의 근원은 궁극적 실재에 대한 원초적 경험의 차이에 있다. 인본주의자는 유신론자처럼 궁극적 실재의 선함을 자기 확증적인 방식으로 경험하지 않으며, 이로 인해 신정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걸림돌로 남는다.
인본주의적 관점의 귀결: 인간중심적 곤경과 역사
인간중심적 곤경 (The Humanocentric Predicament)
기능적 궁극성의 중요한 귀결은 '인간중심적 곤경'이다. 이는 인간의 오만함이 아니라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 인간은 자신의 인간적 본성과 조건을 벗어나 초인간적 관점에서 실재를 볼 수 없다. 모든 주장은 "인간의 척도에 비추어 볼 때"라는 단서가 붙는다.
- 이는 초월적 실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재의 실제 성격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으로 숭배하는 것이 사실은 위장한 악마일 수도 있다.
-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그 목소리가 신의 것인지 몰록의 것인지 스스로 판단해야 했던 딜레마가 모든 인간의 상황을 대변한다.
역사에 대한 비극적 감각
인본주의는 역사가 열린 결말을 가지며 다가치적(multivalued)이라고 본다. 인간의 선택과 행동이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지만, 그 결과가 선하다는 보장은 없다.
- 궁극적 실재가 후원하는, 억압받는 자의 해방이나 더 인간적인 사회를 보장하는 필연적인 역사 발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억압과 해방은 동등하게 가능한 결과이다.
- 인류를 자기 파괴적인 선택으로부터 구해줄 '우주적 구조원'은 없다. 이것이 인본주의가 갖는 역사의 비극적 감각이다. 이는 인간의 노력이 패배할 운명이라는 뜻이 아니라, 한 세대가 이룩한 최선의 계획이 다음 세대의 행동에 의해 파괴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미래 전망: 좁혀지는 간극
존스는 종교적 인본주의의 영향력이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라고 낙관한다. 신학이 인종적 고통의 형태로 제기된 신정론, 사회-정치적 해방 신학, 그리고 민족, 페미니스트, 제3세계 신학에서 비롯되는 신학적 특수성과 씨름하면서 기능적 궁극성에 대한 인정은 가속화될 것이다.
- 기존의 비판가들은 종교적 인본주의가 지지하지 않는 '절대적 인간 자유'라는 허수아비를 공격하고 있다.
- 유신론적 신념의 기반 없이도 전통적인 도덕적 명령이 실천되는 사례들(예: 마오쩌둥 시대 중국의 도덕적 분위기)이 나타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인본주의와 유신론의 다가올 만남과 대화는 악의적인 복수극이 아니라,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양심적인 적수들이 인간 사상의 전쟁터에서 맞서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 논쟁에서 누가 이기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지가 중요하다. 미래 세대는 이 대립을 돌아보며, 두 적수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 멀지 않은 친척"이었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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