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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회의 탄생 과정 중에 있었던 살인과 학살
    신학 이야기 2024. 9. 4. 07:04

    헨리 7세 (해리 튜더)

    무력으로 왕위를 차지한 헨리 7세 (1485-1509)

    헨리 7세(Henry VII)는 웨일스 출신의 귀족으로, 플랜태저넷(Plantagenêt) 가문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Richard III)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리처드 3세는 플랜태저넷 가문의 마지막 왕으로, 많은 이들에게 “진정한 왕족”으로 여겨졌습니다.

    왕조의 안정과 후계자 문제

    헨리 7세는 왕조의 안정을 위해 후계자들의 결혼을 매우 중시했습니다. (왕위에 대한 정당성이 없기 때문에 결혼으로 정당성을 세울 생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의 아들 아서 왕자(Prince Arthur)를 아라곤의 캐서린 공주(Princess Katherine of Aragon)와 결혼시켰습니다. 이 결혼은 1501년 11월 14일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서 왕자가 일찍 사망하자, 헨리 7세는 그의 둘째 아들 헨리 왕자(Prince Henry)와 캐서린의 결혼을 계획하게 됩니다.

    아름답다고 소문났던 캐서린 공주

    캐서린을 아내로 취하려던 헨리 7세

    1503년 6월 25일, 헨리 7세는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요크가 1503년 2월에 사망한 후) 처음에는 자신이 캐서린과 결혼할 생각도 했습니다. 당시 헨리 7세는 45세, 캐서린은 13세, 그리고 헨리 왕자는 11세였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한 몸이 되기 때문에, 아들의 아내, 즉 며느리는 딸이 되는 것입니다. 헨리 7세가 며느리인 캐서린과 결혼하는 것은 딸과 결혼하는 것이라며 반대가 있었습니다.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 문제

    그리하여 둘째 아들인 헨리 8세와 캐서린을 결혼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유약했던 형과 달리 동생은 매우 건강했고, 캐서린 또한 헨리 8세와의 결혼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은 교회법과 성경적 해석에서 논란이 되었습니다.

     

    교회법 및 신학적 문제: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에 대해 두 가지 주요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첫째, 레위기 18:16에 따르면, “네 형제의 아내의 하체를 드러내지 말라. 그것은 네 형제의 하체니라”라는 구절이 문제가 되었고, 둘째로 레위기 20:21에서는 “누구든지 그의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이는 부정한 일이라. 그가 그의 형제의 하체를 드러냈으니, 그들은 자식이 없으리라”라고 명시되어 있어, 이는 형제의 미망인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교회법적 근거로 작용했습니다.

     

    이 문제는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명문화되었으며, 형제의 미망인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교회법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교황 율리우스 2세(Pope Julius II)의 특면: 1504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헨리 왕자와 캐서린의 결혼을 허락하는 교황 특면을 발행했습니다. 이 특면은 교회법적 문제를 해결했지만, 여전히 성경적 해석에 따른 신학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으며, 이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헨리 8세

     

     

    왕이 된 헨리 8세

    1509년 6월 24일, 헨리 8세(Henry VIII)와 아라곤의 캐서린(Katherine of Aragon)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통해 잉글랜드의 왕과 왕비로 즉위했습니다. 이 행사는 그들이 1509년 6월 11일에 그리니치에서 가톨릭 의식으로 결혼한 직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결혼이 치러지기 전, 많은 사람들이 헨리 8세가 캐서린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아무리 왕의 정당성이 중요하다지만, 실제로는 형의 아내였던 사람과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한 캐서린에게 사랑한다며 구애했고, 형과 결혼했던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결국 캐서린과 결혼하고 맙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처음부터 이 결혼의 유효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의심은 주로 캐서린이 헨리의 형인 아서(Arthur)와의 결혼을 했던 사실에 근거했으며, 아서의 사망으로 그 결혼이 끝난 상태였습니다. 이들의 결혼의 정당성은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이 문제는 결혼의 무효 선언과 영국 종교 개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헨리 8세의 대관식

     

    자녀 문제가 생긴 헨리 8세

    1514년까지 아라곤의 캐서린(Katherine of Aragon)은 다섯 명의 자녀를 잃었으며, 이들은 모두 유아기에 사망하거나 사산되었습니다. 그녀의 유일한 생존 자녀는 1516년에 태어난 메리 공주(Princess Mary)였습니다. 메리는 이후 1553년부터 1558년까지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통치하게 됩니다.

     

    신상의 수호

    헨리 8세(Henry VIII)는 당시 가톨릭 교회에 충실했으며, 1521년에 마르틴 루터를 반박하는 신학적 저서 "일곱 성사의 옹호"(Assertio Septem Sacramentorum)를 썼습니다. 이를 통해 헨리는 1521년 10월,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신앙의 수호자"(Fidei Defensor)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헨리는 이전부터 이러한 칭호를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는데, 결국 신앙의 수호자 라는 칭호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앙의 수호자 헨리는 나중에 가톨릭을 버리고 떠나게 됩니다.

     

    젊고 똑똑한 신여성 앤 볼린과의 만남

    1525년: 캐서린의 폐경과 헨리의 결혼 무효 요구

    캐서린의 상태: 1525년에 아라곤의 캐서린(Katherine of Aragon)은 40세가 되었고, 이미 폐경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는 헨리 8세(Henry VIII)가 남성 후계자를 원했던 상황에서 큰 문제였습니다. 캐서린은 헨리에게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녀인 메리 공주(후일의 메리 1세)를 낳았지만, 헨리는 남성 후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앤 볼린과의 관계: 헨리는 당시 미인으로 유명하며 사교계에서 인기를 끌었떤 앤 볼린(Anne Boleyn)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앤은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 야망이 있는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결혼 전에는 헨리와 육체적 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호소했습니다. 앤과 결혼하기 위해 헨리는 현숙하고 착한 아내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로 만들려 했습니다.

     

    헨리의 무효 요청과 로마의 반응

    무효 요구의 배경: 헨리는 (자기들이 요구한 것이지만) 자신의 결혼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의지한 논리는 교황 율리우스 2세가 헨리에게 형 아서(Arthur)의 미망인인 캐서린과 결혼할 수 있도록 허가한 교황 칙서가 성경에 위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헨리는 레위기의 구절(형제의 미망인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을 근거로 이 결혼이 처음부터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유사한 사례: 헨리는 프랑스의 루이 12세(Louis XII)가 교황 알렉산더 6세(Pope Alexander VI)로부터 1498년에 자신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받았던 사례를 들며, 자신도 무난히 결혼 무효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결혼 무효는 당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루이 12세는 무효 판결 후 앤 드 브르타뉴(Anne de Bretagne)와 결혼했으며, 그녀가 사망한 후 헨리 8세의 여동생인 메리 튜더와 결혼했습니다.

     

    토머스 울지의 실패

    헨리는 자신의 충실한 대법관이자 요크 대주교인 토머스 울지(Thomas Wolsey)에게 결혼 무효를 확보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하여 울지는 로마 교황청과의 복잡한 외교적 관계를 통해 헨리의 요구를 수용하도록 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는 교황 클레멘스 7세(Pope Clement VII)에게 헨리의 결혼 무효를 승인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울지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캐서린의 조카인 카를 5세(Charles V)의 영향력 아래 있었고, 카를은 자신의 이모가 결혼 무효 판결을 받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자기가 살려면 당시에는 정당했던 결혼 무효 요청을 들어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교황의 결정이 고무줄 같았던 것이죠.)

     

    울지의 실패와 그 결과

    울지는 헨리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했으나, 결국 교황청으로부터 결혼 무효를 받아내는 데 실패했습니다. 이는 헨리 8세의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울지의 몰락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헨리는 울지가 더 이상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해임했습니다. 결국, 울지는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졌고, 그의 재산은 압류되었으며, 곧이어 그는 반역죄로 기소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울지는 런던으로 압송되던 중 병에 걸려 사망함으로써 재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회와 신학의 중심 이슈가 되었습니다. 토머스 모어(Thomas More)교황의 권력이 절대적이며, 헨리의 요구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는 헨리의 입장을 지지하며 교황이 근친상간을 허용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논쟁은 결국 영국 종교개혁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영국 교회의 독립

    헨리 8세의 종교적 결별과 교회의 독립

    1530년: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는 헨리 8세(Henry VIII)를 지지하기 위해, 왕의 권력이 교황의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성경적 및 역사적 근거를 담은 문서를 작성했습니다. 이는 잉글랜드가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1531년: 헨리 8세는 잉글랜드 의회에 자신을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헨리가 더 이상 로마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었습니다. 상원에 속한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은 "그리스도의 법이 허용하는 한"이라는 단서를 붙여 이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헨리는 교회의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강화했습니다.

     

    1533년: 헨리 8세가 앤 볼린(Anne Boleyn)과 비밀리에 결혼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François I)는 헨리의 주장을 지지했으나, 이 결혼 소식을 듣고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한편, 크랜머는 캔터베리 대주교로서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헨리와 앤의 결혼을 유효하다고 선언했습니다.

     

    1534년: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t VII)는 헨리가 캐서린과 재결합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헨리 8세는 수장법(Act of Supremacy)을 통해 자신을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반역죄로 처벌하는 반역법(Treason Act)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는 헨리의 권력을 교회와 국가 모두에 걸쳐 강화시키는 중요한 법적 조치였습니다.

     

    잉글랜드 교회의 독립과 후속 조치

    1534-1536년: 잉글랜드 교회는 로마 교회로부터 독립했으며, 헨리 8세는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교황권에 대한 논쟁을 제외하고는 큰 교리적 갈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헨리 8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구조와 교리를 그대로 유지했으며, 단지 교황의 권위만을 제거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시기의 잉글랜드 교회는 교황만 없을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였습니다. 헨리 8세는 교회의 개혁을 거의 허용하지 않았으며, 라틴어 벌게이트 성경(Vulgate Bible)을 영어 교회에서 유일하게 허용된 성경으로 남겨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국어인 영어 성경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는 헨리의 보수적인 종교 정책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교황 바오로 3세와의 갈등

    교황 바오로 3세(Paul III)는 헨리 8세와 잉글랜드 교회의 독립에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토머스 모어(Thomas More)와 존 피셔(John Fisher) 주교는 수장법에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했으며, 이로 인해 바오로 3세는 피셔를 추기경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헨리는 그들을 처형함으로써 교황과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이 사건은 잉글랜드와 로마 간의 관계를 크게 악화시켰습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새로운 결혼

    앤 볼린(Anne Boleyn)은 1533년에 엘리자베스(Elizabeth)를 출산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이후 엘리자베스 1세(Queen Elizabeth I)로 알려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 후 두 번의 남자 아이를 임신했으나 모두 유산으로 끝났습니다. 1536년 1월까지 왕실 의사들은 앤이 더 이상 살아 있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헨리 8세(Henry VIII)는 앤 왕비와의 결혼을 끝내기로 결심했습니다. 마치 이전에 캐서린(Katherine) 왕비와의 결혼을 무효화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1536년 1월, 캐서린이 사망하자 헨리에게는 더 이상 중혼의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앤과의 결혼을 해소하는 것이 더 쉬워졌습니다. 법적으로 헨리와 앤의 결혼은 캐서린이 죽으면서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지만, 헨리는 앤을 제거하고 새로운 결혼을 모색하려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헨리 8세의 결혼 생활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부분 중 하나로, 앤 볼린은 결국 1536년 5월에 반역과 간통 혐의로 처형되었습니다.

     

    앤 볼린의 몰락

    앤 볼린의 몰락: 헨리 8세(Henry VIII)의 수석 장관인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은 앤 볼린(Anne Boleyn)을 몰락시키기 위해 간통과 근친상간 혐의로 조작된 혐의를 씌웠습니다. 크롬웰은 앤이 수백 명의 남자들과 간통을 했고, 그녀의 형제 조지(George)와 근친상간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제기했습니다. (사실상 말이 안 되는 내용이기에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그 이후로도 헨리 8세가 아내들을 죽이고 갈아치웠기 때문에 앤 볼린의 혐의에 대해서는 의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한 12일만에 아내를 죽이고 새로운 아내와 결혼한 것도 헨리의 의도를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아이 못 낳으니 토사구팽한 거라고 보는 것입니다.)

     

    크랜머의 배신: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는 자신의 옛 보호자였던 앤을 버리고, 1536년 5월 17일 헨리와 앤의 결혼을 근친상간을 이유로 무효화했습니다.

     

    앤의 처형과 재혼: 이틀 후인 5월 19일, 앤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불과 12일 후인 5월 30일, 헨리 8세는 제인 시무어(Jane Seymour)와 재혼했습니다.

     

    계승 법안: 1536년 7월에 통과된 두 번째 계승법(Second Act of Succession)은 메리(Mary)와 엘리자베스(Elizabeth)를 서자(사생아)로 선언하고, 제인의 자녀에게 계승권을 부여했습니다.

     

    교황과의 화해 거부: 시무어 가문은 가톨릭 동조자로 알려져 있었고, 교황 바오로 3세(Paul III)는 헨리와의 화해를 제안했습니다. 이는 헨리의 첫 두 아내가 사망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해주지 않아서 생긴 문제였는데, 이미 캐서린이 죽었으니 문제가 사라진 것입니다), 헨리는 이미 쟁취해낸 권한이기에, 교황과 화해하여 돌려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황과의 화해를 거부하게 됩니다.

     

    크랜머의 개혁 정책

    사회 개혁

    수도원의 목표: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의 개혁 목표 중 하나는 수도원이었습니다. 1536년 당시, 잉글랜드에는 900개 이상의 종교 시설과 12,000명 이상의 성직자가 있었으며, 이는 전체 인구 300만 명에 비해 매우 큰 비율이었습니다. 잉글랜드의 부의 약 50%가 수도원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에라스무스의 비판 사용: 크랜머는 에라스무스(Erasmus)의 수도원 비판을 활용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수도원을 비판했습니다:

    1. 수도원의 가난, 정결, 순종의 서원은 기본적인 기독교 서약인 세례와 복음 생활보다 열등하다.
    2. 수도원은 악행과 게으름의 온상이다.
    3. 수도원은 미신, 성물 숭배, 사기와 이윤에 찬 기독교를 가르친다.

     

    수도원의 해체 (1536-1541)

    해체 과정: 1535년과 1539년의 억제법(Suppression Acts)은 625개의 수도원을 폐쇄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수도원과 토지 판매로 얻은 자금은 예수 칼리지(Jesus College),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 Cambridge), 매그달렌 칼리지(Magdalen College), 올 소울즈 칼리지(All Souls’ College), 크라이스트 처치 옥스퍼드(Christ Church Oxford) 같은 대학을 설립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새로운 교구(Chester, Gloucester, Peterborough, Bristol, Oxford)도 설립되었습니다. 또한, 왕에게 연간 약 20만 파운드의 추가 수입을 제공했습니다. (추후에 메리 1세(Mary I)는 그녀의 통치 기간 동안 단 6개의 수도원을 복원했습니다.)

     

    그 외의 개혁들

    교리 개혁  - 1536년의 열 가지 조항: 크랜머는 1536년에 열 가지 교리적 개혁 조항(Ten Articles)을 제시하며 교리를 재정립하려 했습니다.

    예배 개혁 - 기도서 개정: 크랜머는 1549년에 첫 번째 기도서(First Prayer Book)를, 1552년에 두 번째 기도서(Second Prayer Book)를 출간하여 예배 형식을 개혁했습니다.

     

    헨리 8세의 영국 국교회의 모습

    헨리 8세가 구상한 에클레시아 앵글리카나는 영국 내 가톨릭 교회로서, 초기 교부적 가톨릭 교회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부패(수도원주의)와 중세적 요소(교황권)를 제거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법적 목적에 있어서, 왕이 교황을 대체하였습니다.​

     

    영국 교회는 법에 의해 제정된 종교입니다(출처 - Canon Law, 1604). 2023년 현재, 26명의 성공회 주교들이 영국 의회의 상원인 하원(House of Lords)에 자동으로 의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제도는 윌리엄 1세, 노르망디 공작의 통치 시기(1066-1087)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왕은 자신을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 여기며, 교황 알렉산더 2세의 어떠한 “간섭”도 거부했습니다. 영국 왕들이 교황청에 대한 접근 방식은 프랑스 왕들의 그것을 밀접하게 반영합니다. 성공회(개신교 개혁 이전에도)는 갈리칸주의의 자율성을 반영한 거울과도 같습니다.

     

    약속을 어기고 백성을 학살한 헨리 8세

    1536년 이후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교회의 독립을 굳건히 다지기로 결심했습니다. 교황 바오로 3세(Paul III)의 화해 제안을 거부한 후, 로마와의 재결합이 불가능해지자, 잉글랜드의 독립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헨리 8세의 반응이 매서웠습니다.

     

    은총의 순례(Pilgrimage of Grace) 반란

    은총의 순례(Pilgrimage of Grace) 반란은 1536년 잉글랜드 북부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란으로, 헨리 8세의 종교 개혁 정책, 특히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결별 및 수도원 해체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반란은 주로 요크셔 지역에서 시작되었으며, 곧 다른 북부 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배경과 원인

    종교적 반발: 헨리 8세가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하고 잉글랜드 교회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수도원 해체와 같은 종교 개혁 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특히 잉글랜드 북부에서 강한 반발을 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헨리의 개혁이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과 관습을 파괴한다고 믿었습니다.

     

    사회적 불만: 수도원의 해체는 지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수도원은 단순히 종교 기관이 아니라 지역 사회의 중심지로서, 가난한 이들을 돕고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 기관이 해체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반란의 전개 및 진압

    반란의 시작: 1536년 10월, 로마와의 결별에 불만을 가진 약 4만 명의 북부 귀족과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은총의 순례"라는 이름 아래, 헨리 8세에게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을 되돌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생각보다 거센 반응에, 헨리 8세는 평화와 사면을 약속하며 반란군과 휴전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반란군을 잠재우기 위한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했습니다.

     

    약속 위반: 헨리 8세는 반란이 진정된 후 약속을 어기고, 반란의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했습니다. 이로 인해 헨리 8세의 잔인한 통치 방식과 그의 종교 개혁 정책에 대한 비판이 더욱 거세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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