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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전례력, 교회력 즉 절기, 금식, 그리고 주간 주기의 기원과 발전에 대하여책&논문 소개 2025. 12. 13. 08:49
혼란에서 달력으로 - 기독교 휴일의 기원
좀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세요https://christianprince.tistory.com/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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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은 Paul F. Bradshaw와 Maxwell E. Johnson의 책 The Origins of Feasts, Fasts, and Seasons in Early Christianity에 대해 정리한 것이다. 해당 책은 초기 기독교의 전례력, 즉 절기, 금식, 그리고 주간 주기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을 제공한다. 핵심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전례력'의 점진적 형성: '전례력'이라는 통일된 개념은 비교적 현대에 등장했다. 초기 기독교의 축일과 절기들은 하나의 계획된 체계가 아니라, 서로 무관한 여러 주기(주간 주기, 부활절 주기, 성탄절 주기, 순교자 및 성인 주기)가 개별적으로 발전하며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각 주기들은 서로 겹치거나 충돌하기도 했다.
2. 안식일에서 주일로의 전환: 안식일 준수에서 주일 예배로의 전환은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더 느리고 복잡한 과정이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은 유대교와 자신들을 구분하려는 동기에서 주일을 예배일로 채택했으나, 안식일 준수의 흔적은 이후 기독교 관습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토요일을 금식하지 않음으로써 존중했고, 로마 교회는 반대로 토요일을 금식일로 지정하는 등 지역별로 상이한 관습이 나타났다.
3. 부활절의 기원과 발전: 현재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유대교의 유월절 날짜인 니산(Nisan)월 14일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했던 '14일파(Quartodeciman)'의 관습이 가장 오래된 형태의 부활절(파스카)로 보인다. 유월절 다음의 일요일에 부활을 기념하는 관습은 2세기 후반에 등장한 것으로, 이는 기독교를 유대교 뿌리로부터 분리하려는 경향의 일부였다. 이로 인해 부활절의 중심 의미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부활로 점차 이동하게 되었다.
4. 사순절의 복합적 기원: 사순절은 부활절 준비 금식이 점차 확장되어 형성되었다는 기존의 단선적인 이론과 달리, 여러 독립적인 전통이 결합된 결과물이다. 주요 기원으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주현절(1월 6일) 이후에 예수의 광야 시험을 모방하여 지켰던 40일간의 금식 전통과, 로마와 예루살렘 등지에서 세례 후보자들을 위해 시행되었던 3주간의 집중 준비 기간이 있다. 이러한 전통들은 4세기 니케아 공의회 이후 부활절을 중심으로 통합되면서 보편적인 사순절로 표준화되었다.
5. 성탄절과 주현절의 등장: 12월 25일 성탄절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요 학설이 대립한다. '종교사 학설'은 로마의 '무적 태양신(Sol Invictus)' 축일을 대체하려는 시도였다고 보며, '계산 학설'은 그리스도의 수태와 죽음이 같은 날(3월 25일)에 일어났다는 고대의 믿음에 따라 출생일을 9개월 후인 12월 25일로 계산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한편, 1월 6일 주현절은 성탄절보다 훨씬 더 오래된 축일로, 원래는 로마의 지역적 축일이었던 성탄절보다 더 넓은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지켜졌다.
6. 순교자와 성인 공경: 순교자와 성인들을 기리는 주기는 부활절 축하만큼이나 오래된 기원을 가지며, 초기 신자들의 신심 생활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축일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특히 순교자 공경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론: '전례력' 개념의 형성
초기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우리가 '전례력(liturgical year)'이라고 부르는 통일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전례력'이라는 용어 자체도 16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사용되기 시작했다. 고대 기독교인들은 한 해 동안 경험하는 다양한 축일, 금식, 절기들을 하나의 통합된 실체로 보지 않았다. 이러한 절기들은 계획되거나 조율된 방식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완전히 무관한 여러 주기들이 독립적으로 발전하면서 형성되었다.
- 주간 주기: 유대교에서 유래한 7일 주기로, 안식일 대신 '주일(Lord's Day)'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 부활절(파스카) 주기: 가장 오래된 연간 주기로, 유대교 유월절에서 유래했다. 시간이 지나며 준비 기간(사순절, 성주간)과 축하 기간(오순절)이 앞뒤로 확장되었다.
- 성탄절과 주현절 주기: 부활절 주기보다 늦게 등장했으며, 율리우스력의 고정된 날짜(12월 25일, 1월 6일)에 기반을 두었다. 이로 인해 날짜가 유동적인 부활절 주기와 자주 겹쳤다.
- 순교자와 성인 주기: 다른 주기들과 독립적으로 발전했으며, 지역 공동체의 영웅들을 기리는 축일들은 일반 신자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졌다. 이는 종종 그리스도 중심의 축일보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이처럼 다양한 뿌리를 가진 주기들이 결합하여 4세기 교회의 예배 생활을 구성했고, 후대 전례력의 기초를 형성했다.
안식일과 주일1. 사도 시대의 주일 준수 논쟁
초기 기독교의 주일 준수 기원에 대한 연구는 학자 자신의 교파적 배경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는 경향을 보여왔다. 이는 해당 주제에 대한 명확하고 확실한 증거가 부족함을 시사한다.
- 빌리 로르도르프 (스위스 개혁교회): 주일은 안식일과 무관하게 초대 교회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났으며, 예수의 부활 후 식사 모임에 뿌리를 둔 저녁 성찬례의 날이었다고 주장했다.
- 사무엘레 바키오키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주일 준수는 2세기 초 로마의 식스투스 주교 시절에 시작되었으며, 그 이전 기독교인들은 안식일을 지켰다고 주장했다.
- 로저 벡위드 & 윌프리드 스톳 (영국 복음주의): 주일은 기독교 초기부터 안식일과 동등한 휴식의 날로 지켜졌다고 주장했다.
신약성경에서 주간 첫날에 정기적인 모임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구절은 단 세 곳이지만, 모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 고린도전서 16: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이는 주간 첫날이 특별한 의미를 가졌음을 암시하지만, 공동 예배가 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개인이 돈을 보관하라는 지시로 해석될 수도 있다.
- 사도행전 20:7–12: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이는 트로아 공동체가 주일에 정기적으로 성찬례를 거행했음을 시사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의 출발을 위한 특별 모임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요한계시록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주의 날(κυριακῇ ἡμέρᾳ)'이 주일을 의미하는지, 종말론적인 '주의 날' 혹은 부활절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갈린다.
《디다케》(14.1)와 같은 동시대 문헌은 '주의 날'에 모여 빵을 떼라고 지시하여 주일 예배의 관습을 뒷받침하는 듯 보이지만, 이 역시 일부 학자들은 부활절이나 속죄일 기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2세기 초 비티니아 총독 소 플리니우스가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기독교인들이 '정해진 날(stato die)'에 모인다고 언급했지만, 이 날이 주일인지 토요일인지는 불분명하다.
누적된 증거는 다소 희박하지만, 1세기 말경에는 아시아 미노르와 시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일부 공동체에서 주일 준수 관습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2. 후기 기독교 관습에 남은 안식일의 흔적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이후 안식일 준수가 사라졌다는 기존의 주장과 달리, 3세기와 4세기 문헌들은 안식일이 기독교 관습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이는 유대주의로의 회귀라기보다는, 고대 전통의 요소들이 변형된 형태로 보존된 결과로 보인다.
- 북아프리카 (3세기 초, 터툴리안): 일부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에 무릎을 꿇지 않고 기도했으며, 이는 교회 내에서 논쟁거리가 될 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또한 토요일은 부활절 기간을 제외하고는 금식해서는 안 되는 날로 여겨져, 주일처럼 특별한 존중을 받았다.
- 로마: 북아프리카나 동방과 달리 토요일에 금식하는 관습이 있었다. 5세기 초 교황 인노첸시오 1세는 이를 사도들의 슬픔(그리스도가 무덤에 계셨던 시간)과 연관 지어 옹호했다. 이 관습은 로마와 일부 서방 교회에 퍼져 있었다.
- 동방 (시리아, 아시아 미노르): 유대교 뿌리와의 더 긴밀한 연결을 보여준다.
- 《디다스칼리아 아포스톨로룸》(3세기)은 유대-기독교인들에게 안식일을 주일과 동등하게 취급하지 말라고 촉구하는데, 이는 그러한 관습이 여전히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 《피오니우스의 순교록》과 《폴리카르푸스의 생애》는 3세기 스미르나 지역에서 토요일에 정기적으로 성경 봉독과 설교를 위한 집회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4세기에는 동방의 많은 지역에서 토요일과 주일 모두에 성찬례를 거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역사가 소크라테스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주일만 성찬례 거행)가 고대 전통을 잃어버렸다고 오해할 정도였다. 이는 4세기의 토요일 준수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더 오래된 관습의 연속이자 발전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라오디케아 공의회(약 363년)는 안식일에 쉬는 것(유대주의화)을 금지했지만(29조), 그날 복음서와 다른 성경을 읽도록 규정했다(16조). 이는 안식일이 '휴식의 날'에서 '창조를 기념하고 하느님의 법을 배우는 날'로 변형되었음을 보여준다.
3. 4세기 주일의 변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21년 3월 3일 '가장 존엄한 태양의 날'에 농부를 제외한 모든 이에게 휴식을 명하는 법을 공포하면서 주일의 성격은 크게 변했다.
- 휴식의 날로서의 주일: 이 법은 기독교인들이 이전까지 '나태함'으로 비난했던 유대인의 안식일 휴식 개념을 주일에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법의 형식(농부 예외 등)은 구약성경이 아닌 로마의 이교도 축일 휴가법을 따랐다. 이는 콘스탄티누스의 의도가 유대적 안식일의 기독교 버전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 예배일로서의 주일: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이 법이 공포된 후, 주일을 '참된 안식'의 날로 재해석했다. 그는 주일이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영적 제사를 통해 하느님께 봉사하는 날이라고 강조했다.
- 예루살렘의 주일 부활 대축일(Vigil): 4세기 예루살렘에서는 매주 주일 새벽(닭이 울 때)에 부활 기념 예식이 생겨났다. 순례자 에게리아의 기록에 따르면, 주교는 부활 기념 성당(아나스타시스)의 동굴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복음서를 낭독했다. 이 예식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며 애도와 기쁨을 동시에 표현하는 시간이었다. 이 관습은 순례자들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으며, 《사도 헌장》에서도 유사한 형태가 발견된다.
4. 기독교의 주간: 수요일과 금요일 금식
《디다케》는 "너희의 금식을 위선자들과 함께하지 마라. 그들은 이틀째 되는 날과 닷새째 되는 날에 금식하지만, 너희는 나흘째 되는 날과 준비일(금요일)에 금식해야 한다"(8.1)고 지시한다. 이는 유대인(특히 바리사이파)이 지키던 월요일과 목요일 금식에서 벗어나 기독교 고유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시도였다.- 날짜 선택의 배경: 수요일과 금요일이 임의로 선택된 것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일부 학자들은 쿰란 공동체에서 사용된 태양력의 영향일 수 있다고 본다. 이 달력에서 수요일은 창조가 시작된 날, 금요일은 속죄일이 있는 날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 금식의 발전: 이 관습은 널리 퍼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겐, 터툴리안 등의 저술에서도 확인된다.
- '스테이션(Station)': 헤르마스의 목자와 터툴리안은 금식일을 '보초 근무'를 의미하는 라틴어 'statio'라고 불렀다.
- 예배와의 결합: 터툴리안에 따르면, 금식은 오후 3시(제9시)에 기도로 마무리되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된 시간으로 해석되었다. 또한 금식일에 성찬례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논쟁도 있었는데, 이는 금식일에 성찬례가 실제로 거행되었는지, 혹은 금식과 성찬례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를 두고 초기 교회 안에서 실천적 논의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 신학적 의미 부여: 후대 저술가들은 수요일을 예수가 체포된 날, 금요일을 수난의 날로 해석하며 금식의 신학적 근거를 마련했다.
- 4세기의 관습: 4세기에는 금식과 더불어 특별 예배가 정착되었다.
-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성찬례 없는 말씀 전례가 거행되었다.
- 예루살렘에서는 오후 3시에 시온에서 예배를 드렸다.
또한 일부 수도원 공동체에서는 금요일 밤샘 기도(vigil)가 매주 거행되었다. 이는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아침 성찬례까지 이어지는 철야 기도로, 주로 수도승들과 독실한 신자들이 참여했다.
부활절과 오순절
1. 14일파의 부활절 축하 (Quartodeciman Celebration)
초기 기독교에는 두 가지 뚜렷한 부활절 기념 방식이 있었다. 오늘날 보편화된 방식은 유대 유월절 다음의 일요일에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 오래된 형태는 아시아 미노르와 시리아 동부 지역에서 발견되는 '14일파'의 관습이다.
- 기원과 특징: 14일파는 유대력 니산월 14일에 예수의 죽음을 기념했다. 이는 유월절 희생양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요한복음의 연대기와 일치한다. 이 관습은 사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부활절로 여겨진다.
- 의례: 14일파의 파스카는 유대인들이 유월절 식사를 하는 동안 금식하며 밤샘 기도(vigil)를 하고, 자정 무렵에 성찬례를 포함한 아가페 만찬으로 축제를 시작하는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밤샘 기도 중에는 출애굽기 12장(유월절 규정)을 읽고, 이를 그리스도의 수난과 구속에 대한 예표로 해석하는 설교(예: 사르디스의 멜리토의 《파스카에 관하여》)가 행해졌다.
- 의미: '파스카'라는 단어를 '고난받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파테인(pathein)'에서 유래했다고 해석할 정도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죽음만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에서부터 부활과 승천에 이르는 구속 행위 전체를 포괄하는 기념이었다.
14일파 관습은 3세기 초 아시아 지역에서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모든 교회가 주일에 부활절을 지키도록 결정하면서 점차 사라졌다.
2. 주일 부활절의 발전과 날짜 논쟁
유월절 다음 일요일에 부활절을 지키는 관습은 2세기 후반에 널리 퍼졌으나, 그 기원은 14일파 관습보다 후대이다. 로마에서는 165년경 소테르 주교 시대 이전에는 연례 부활절을 아예 지키지 않았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 기원: 주일 부활절은 주일이 정기적인 예배일로 확립된 1세기 말 이후에야 가능했다. 이는 유대교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동기와, 주일이 이미 주간 단위의 부활 기념일이었기에 기존 예배를 확장하기 용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 의미의 변화: 기념일이 주일로 옮겨지면서, 축제의 중심 의미는 점차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부활'로 이동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여전히 수난의 의미가 강하게 남아 있었다.
- 준비 금식: 부활절이 주일로 옮겨지면서, 14일파가 니산월 14일에 지키던 준비 금식도 함께 이동하여 토요일(성토요일)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는 대부분의 교회가 토요일 금식을 금지했던 관습의 중요한 예외가 되었다. 이 금식은 금요일의 정규 금식과 합쳐져 이틀간의 금식이 되었고, 일부는 이를 연결하여 40시간 연속 금식을 하기도 했다. 이것이 이후 성주간과 사순절로 발전하는 기초가 되었다.
- 날짜 계산의 문제: 유월절 날짜 자체가 유동적이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부활절 날짜를 독자적으로 계산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 과정에서 천문학적 지식의 한계로 인해 다양한 계산법(16년 주기, 84년 주기, 19년 주기 등)이 등장했고, 이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등 주요 교회들 간의 부활절 날짜 불일치로 이어졌다.
- 니케아 공의회(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모든 교회가 통일된 날짜에 부활절을 지키도록 명했다. 이는 유대력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계산법을 따르자는 것이었으며, 기독교를 유대교와 명확히 분리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통일된 계산법이 제시되지 않아 이후에도 지역 간 날짜 차이는 수 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3. 성삼일(Triduum)의 발전
원래 하나의 단일한 축제였던 부활절은 3세기에 이르러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건너감(passage)'이라는 의미가 부각되면서(특히 오리겐을 통해), 점차 세 부분으로 구성된 기념으로 발전했다.
- 성금요일: 그리스도의 죽음 기념
- 성토요일: 무덤에 머무심 기념 (동방에서는 '지옥에 내려가심'과 연결)
- 부활 주일: 부활 기념
이러한 '성삼일' 개념은 4세기 예루살렘의 순례 관습과 결합하여 구체적인 전례 예식들로 발전했다.
- 예루살렘의 예식 (에게리아의 기록):
- 성 금요일: 오전에 골고타에서 '참된 십자가' 유물을 공개하고 경배하는 예식이 있었다.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성경 봉독과 기도로 이루어진 말씀 전례가 거행되었다. 저녁에는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는 복음 구절을 읽으며 하루를 마쳤다.
- 성 토요일: 특별한 예식 없이 파스카 밤샘 기도(vigil)로 이어졌다.
- 부활절 밤샘 기도: 세례 예식이 거행된 후, 골고다의 대성당(마르티리움)에서 첫 번째 성찬이, 이어서 부활 기념 성당(아나스타시스)에서 부활 복음을 읽고 두 번째 성찬례가 거행되었다.
이러한 예루살렘의 관습, 특히 십자가 경배 예식은 순례자들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으나, 모든 지역이 이를 동일하게 모방하지는 않았다. 로마에서는 7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십자가 경배 예식이 도입되었다.
4. 오순절: 위대한 50일
초기 기독교의 오순절은 유대교의 '주간절'처럼 단 하루의 축일이 아니라, 부활절부터 50일간 이어지는 하나의 긴 축제 기간이었다.
- 기원과 특징: 2세기 말 문헌(《바울 행전》, 이레네우스, 터툴리안)에서 처음 확인된다. 이 50일 동안은 매일이 주일처럼 취급되어, 금식과 무릎 꿇는 기도가 금지되었다. 이 기간은 예수의 부활, 승천, 성령 강림, 그리고 재림에 대한 희망을 모두 포함하는 '가장 기쁜 시기'로 여겨졌다.
- 부활 팔일 축제: 50일 중에서도 첫 8일(부활 팔일)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이 기간 동안 새로 세례받은 이들은 세례와 성찬의 의미에 대한 '신비 교육(mystagogy)'을 받았다.
- 분열과 변화: 4세기 후반, 사도행전의 연대기(부활 후 40일째 승천, 50일째 성령 강림)의 영향으로 50일의 통일성이 점차 약화되었다.
- 예수 승천 대축일: 4세기 말 안티오키아 등지에서 40일째 되는 날에 별도의 승천 축일이 생겨났고, 5세기 초에는 거의 보편화되었다.
- 성령 강림 대축일: 50일째 되는 날은 성령 강림을 기념하는 날로 굳어졌다. 예루살렘에서는 이날 승천과 성령 강림을 함께 기념했다.
이러한 분화로 인해 일부 교회에서는 승천 이후부터 다시 금식을 시작하는 등, 50일 전체를 하나의 기쁨의 시기로 지키는 고대 관습은 점차 변형되었다.
5. 부활절 세례
부활절이 세례를 위한 가장 적합한 시기라는 관념은 초기 기독교의 보편적인 관행이 아니었으며, 4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이상적인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 초기 관습: 초기에는 세례 전 1~2일의 금식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금식이 금지된 토요일을 포함하는 주일 세례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축일 전 금식 기간이 끝나는 시점이 자연스러운 세례 시기가 되었을 것이다.
- 북아프리카와 로마의 선호: 2세기 말 터툴리안은 부활절(파스카)을 세례에 가장 장엄한 날로 추천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세례받는 주님의 수난"이 그때 완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로마서 6장의 신학(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세례)을 암시했다. 이는 실용적인 이유(이미 금요일과 토요일 금식이 있었음)와 신학적 이유가 결합된 결과로 보인다.
- 4세기 이후의 보편화: 부활절 세례가 보편적인 이상이 된 것은 4세기 후반부터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모든 지역에서 유일한 세례 시기로 지켜지지는 않았다.
- 로마: 교황 시리치오(385년)와 레오(447년)는 부활절과 오순절만이 정규 세례일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다른 지역(스페인, 시칠리아)에서 성탄절, 주현절, 성인 축일에 세례를 주는 관습이 있었음을 반증한다.
- 동방: 카파도키아의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우스는 주현절, 부활절, 오순절에 세례를 받으려는 관습이 있었음을 언급한다.
- 알렉산드리아: 고유의 전통에 따라 주현절 이후 40일 금식이 끝나는 시점에 세례를 주다가, 4세기 중반에야 이 기간을 부활절 전으로 옮겼다. 하지만 세례 자체는 부활절 밤샘 기도 중이 아니라, 성주간이 시작되기 전 금요일에 거행하는 관습을 유지했다.
결론적으로, 부활절 세례는 고대 기독교에서 널리 퍼진 이상이었지만, 실제로는 여러 다른 축일에도 세례가 거행되는 등 다양한 관행이 공존했다. 이는 50년도 채 지속되지 못한 실험적인 관행으로 평가될 수 있다.
사순절과 성주간
1. 사순절의 복합적 기원
사순절(Quadragesima, 40일)의 기원은 부활절 전 짧은 금식이 점차 뒤로 확장되었다는 기존의 단선적 이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최근 학계에서는 사순절이 여러 독립적인 기원을 가진 다양한 관습들이 4세기 니케아 공의회 이후 부활절을 중심으로 통합된 결과물이라고 본다.
- 기존 이론의 한계: 그레고리 딕스(Gregory Dix) 등이 주장한 '역사주의' 이론은, 4세기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역사적으로 재현하려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예수의 40일 광야 금식을 모방하기 위해 사순절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4세기 이전의 다양한 관습들을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 다원적 기원: 사순절은 단일한 기원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여러 전통의 융합체이다.
- 성주간 금식: 3세기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에서 나타난 6일간의 부활절 직전 금식은 사순절의 일부라기보다는 '성주간(Great Week)'의 직접적인 기원으로 보아야 한다.
- 3주간의 세례 준비 기간: 로마, 예루살렘, 스페인 등 여러 지역에서 세례 후보자들을 위한 3주간의 집중 교육 및 준비 기간이 존재했다. 이 기간은 원래 부활절과 무관하게 세례가 거행될 때마다 시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40일간의 금식 전통: 가장 중요한 기원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발견된다. 이곳에서는 예수의 세례를 기념하는 주현절(1월 6일) 다음 날부터, 예수의 광야 시험을 모방한 40일간의 금식을 지켰다. 이 기간은 원래 부활절과 아무 관련이 없었으며, 세례 후보자 준비 및 참회자들을 위한 기간으로 기능했다.
니케아 공의회(325년) 이후 부활절 날짜가 통일되고 부활절 세례가 보편적인 이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이러한 준비 기간들이 부활절 앞으로 이동하고 결합하여 오늘날과 같은 40일간의 사순절을 형성하게 되었다.
2. 40일 계산법의 다양성
40일이라는 기간은 상징적이었기 때문에, 실제 금식일 수를 계산하는 방식은 지역마다 달랐다.
- 로마: 사순절은 부활절 6주 전 일요일에 시작되었다. 주일에는 금식하지 않았으므로,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을 포함해도 실제 금식일은 36일이었다. 후에 이 기간 앞에 4일을 추가(재의 수요일)하여 실제 금식일을 40일로 맞추었다.
- 알렉산드리아: 처음에는 로마처럼 6주간이었으나, 토요일과 주일을 모두 금식하지 않아 실제 금식일은 30일에 불과했다. 이를 40일에 가깝게 맞추기 위해 점차 기간을 늘려 최종적으로는 부활절 8주 전부터 시작하는 사순절이 되었다.
- 예루살렘: 순례자 에게리아는 4세기 말 예루살렘에서 8주간의 사순절(7주간의 일반 사순절 + 1주간의 성주간)을 지켰다고 기록했다.
3. 예루살렘의 성주간
성주간의 각 요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예식을 거행하는 관습은 4세기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순례자들이 예수의 마지막 주간의 사건들이 일어났던 바로 그 장소에서 전례에 참여하고자 했던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 나사로 토요일: 성주간이 시작되기 전 토요일. 순례자들은 예수가 나사로를 되살린 베다니를 방문하여 관련 복음을 읽고 기도했다. 이 관습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논쟁이 있다.
-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오전에 정규 예배를 드린 후, 오후에는 감란산에 모여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마태복음 21장)을 읽고, 종려나무나 올리브 가지를 들고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를 노래하며 예루살렘 성으로 행렬했다. 이 관습은 동방 교회에 빠르게 퍼졌으나, 서방, 특히 로마에서는 11세기 말에야 도입되었다.
- 성주간 월요일-수요일: 기존의 사순절 예배에 더해, 매일 오후 3시부터 4시간 동안 추가적인 말씀 전례가 있었다. 특히 화요일 저녁에는 올리브 산에서, 수요일 저녁에는 아나스타시스에서 예수의 마지막 가르침과 유다의 배반에 관한 복음을 읽었다.
- 성목요일: 두 번의 성찬례가 거행되었다. 하나는 사순절 금식을 마치는 의미, 다른 하나는 성찬례 제정을 기념하는 의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저녁부터 밤늦게까지는 올리브 산, 겟세마네 등 예수의 마지막 밤의 행적을 따라 이동하며 기도와 성경 봉독을 하는 철야 기도(vigil)가 이어졌다.
이러한 예루살렘의 예식은 사건의 모든 세부 사항을 극적으로 재현하기보다는, 성스러운 장소를 순례하고 관련 성경을 읽으며 사건을 '기념하는(rememorative)' 방식이었다. 이는 지리적 장소가 역사적 사건보다 전례 형성 과정에 더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성탄절과 주현절
12월 25일: 두 가지 경쟁 이론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기념하는 가장 오래된 확실한 증거는 354년의 '필로칼루스 달력'에서 발견된다. 이 달력은 늦어도 336년까지는 로마에서 이 축일이 지켜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날짜가 선택된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주요 학설이 있다.
1. 종교사(History of Religions) 학설: 이 학설은 성탄절이 로마의 이교 축일을 대체하기 위해 제정되었다고 본다. 274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12월 25일(당시 동지)을 '무적 태양신(Sol Invictus)'의 축일로 선포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해 같은 날을 축일로 정하여, 이교 축제에 대한 대항마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학설은 헤르만 우제너(Hermann Usener)에 의해 처음 체계적으로 제시되었고, 베르나르 보트(Bernard Botte) 등에 의해 지지받으며 다수설로 자리 잡았다.
2. 계산(Computation) 학설: 이 학설은 12월 25일이 신학적 계산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고대 유대-기독교 사상에는 위대한 인물은 잉태된 날과 죽은 날이 같다는 믿음이 있었다. 루이 뒤셴(Louis Duchesne)이 처음 제기한 이 가설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가 3월 25일에 수난을 당했다고 믿었으므로, 그의 수태 역시 3월 25일에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따라서 출생일은 그로부터 정확히 9개월 후인 12월 25일이 된다는 것이다. 토마스 탤리(Thomas Talley)는 도나투스파 분열(311년) 이전에 북아프리카에서 이미 성탄절을 지켰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이 학설을 지지했다.
두 학설 모두 결정적인 증거는 부족하여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1월 6일 주현절이 12월 25일 성탄절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더 넓은 지역에서 지켜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로마 교회가 다른 지역의 주현절에 필적하는 고유한 축일을 만들기 위해 이교 축일과 같은 날짜를 선택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성탄절은 로마에서 시작되어 점차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서방: 북아프리카에서는 360년대에,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380년대에 성탄절 준수가 확인된다. 그러나 암브로스 시대의 밀라노에서는 여전히 1월 6일에 예수의 탄생을 기념했을 가능성이 크다.
- 동방: 안디옥에서는 요한 크리소스톰의 설교를 통해 386년경에 비교적 최근에 도입되었음이 확인된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에 의해 380-381년에 이미 지켜지고 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과 이집트에서는 5세기가 되어서야 도입되었고, 아르메니아에서는 아예 채택되지 않았다.
이처럼 성탄절의 전파는 이전에 생각했던 것만큼 빠르거나 보편적이지 않았다. 아리우스 논쟁 시기에 성육신을 강조하는 이 축일이 니케아파에게 유리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오히려 연약한 아기의 모습이 아리우스파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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