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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설교가와 철학자 사이의 상관 관계책&논문 소개 2026. 1. 9. 15:06
이번 포스팅에서는 Jaclyn L. Maxwell의 책, Christianization and Communication in Late Antiquity John Chrysostom and his Congregation in Antioch의 첫 번째 장을 중심으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번 장에서 Jaclyn L. Maxwell은 후기 고대 시대 기독교 설교가 이교도 철학, 특히 제2 소피스트 운동의 영향을 받아 대중과 소통하던 기존의 사회적 틀 속에서 어떻게 부상하고 대중적 인기를 얻었는지를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기독교 설교자들은 단순히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윤리적 지침을 제공하던 이교도 철학자 및 소피스트들의 공적 역할을 계승하고 변형시킨 존재였다.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첫째, 이교도 지식인 사회 내에서는 은둔적 사색과 대중적 참여라는 두 가지 삶의 방식에 대한 깊이 있는 논쟁이 있었다. 막시무스, 율리아누스, 테미스티우스와 같은 인물들은 철학이 소수의 엘리트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에게 필요하며,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했다.
둘째, 대중과의 효과적인 소통을 위해 수사학적 기교와 명료성 사이의 균형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일부는 난해한 고어(아티카어)를 사용하여 학식을 과시했지만, 디오 크리소스토무스나 플루타르코스와 같은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은 철학적 개념을 폭넓은 청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명료하고 간결한 스타일을 옹호했다.
셋째, 특히 견유학파 철학자들은 거리나 극장에서 대중을 직접 상대하며 상당한 인기를 끌었으며, 이는 대중이 철학적 담론에 익숙해지는 기반을 마련했다.
넷째,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이교도의 지적 유산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들은 철학자의 외양과 공적 페르소나를 차용하고, 고전 교육(파이데이아)을 설교에 활용했으며, 자신들이야말로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에게 지혜를 전하는 '진정한 철학자'라고 주장했다. 이고니아의 주교 암필로키우스의 사례는 이교도 수사학 교육을 받은 기독교 지도자가 어떻게 대중을 사로잡는 설교가로 성공할 수 있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설교의 성공은 성경 해석이라는 고유의 목적 외에도, 대중 앞에서 지혜를 논하던 로마 사회의 오랜 지적 전통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기독교 설교자들은 이 전통을 활용하여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윤리적으로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서론: 기독교 설교와 이교도 철학의 연속성
후기 고대 시대에 기독교 설교자들은 전통적으로 철학자 및 그들의 학파와 연관되었던 도덕적 이상에 따라 전체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시도했다. 그들은 평신도들이 세속적인 쾌락과 명예를 거부하고 성서가 제시하는 영적인 삶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고자 했다. 그들의 윤리적 가르침 중 다수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빈번한 설교를 통해 기독교인들은 평신도에게 올바른 사고와 삶의 방식을 가르치는 체계적인 접근법을 개발했다.
기독교 지도자들의 대중적 성공은 그들의 설교가 대중에게 잘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주며, 이는 당시 교육받은 연설가와 대중 청중 사이의 접촉을 위해 이미 존재하던 사회적 틀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 특히 기원후 첫 4세기 동안 지속된 그리스 문학과 문화의 부흥기인 '제2 소피스트 운동(Second Sophistic)'은 철학적 내용과 수사학적 형식을 동시에 중시했다. 이로 인해 철학자들은 더 넓은 청중을, 소피스트들은 더 진지한 내용을 다루게 되어 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특히 견유학파(Cynics)의 영향으로 윤리와 대중적 이미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일부 철학적 논의는 일반 청중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교도 철학자들은 기독교 설교자들이 대중을 위한 윤리 전문가로 자리매김하는 무대를 마련했다. Jaclyn L. Maxwell은 이교도 사상가들이 사회에서 맡았던 역할, 대중 연설에 적합한 언어와 스타일에 대한 논의, 그리고 이들이 대중에게 다가갔던 사례들을 검토함으로써 이러한 연속성을 조명한다.
이교도 지식인의 공적 역할에 대한 논쟁
로마 제국의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이상적인 삶의 방식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존재했다. 하나는 세상과 단절된 채 사색에 잠기는 은둔적 삶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공적 봉사의 삶이었다.
은둔적 삶 vs. 공적 삶
- 막시무스 투리우스(Maximus of Tyre, c. 150 CE 활동): 그는 많은 사람들이 철학자를 늙고, 가난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로 여겨 철학적 삶을 꺼린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에 반박하며 철학자는 도시에 필수적인 존재이며, 사회 참여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에게 철학은 특정 지식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기본적 필요"였다. 그는 활동적인 철학자는 군중 앞에 서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반면, 은둔적인 철학자는 대중과 상호 적대적인 분위기를 만든다고 주장했다.
- 율리아누스 황제(Julian, 4세기): 황제라는 극적인 공적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중의 칭송에 대한 사랑을 악덕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철학자가 사회로부터 완전히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적 인기에 대한 무관심과 동료 시민들을 가르치는 책임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견유학파는 "모범을 보일 뿐만 아니라 강의를 통해서도 동료 시민들에게 이익을 주었다."
- 테미스티우스(Themistius, 4세기): 황제의 고문이자 콘스탄티노플의 대중 연설가였던 테미스티우스는 극장에서 일반 사람들에게 연설했다는 이유로 동료들에게 '소피스트'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이에 대해 수사학적 기교가 "소수의 학생들만이 아닌 대중이 철학을 즐겁게 받아들이게" 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혹독한 비판만 일삼는 철학자들은 청중을 떠나가게 만들 뿐이라고 지적하며, 대중에게 철학적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수사학적 표현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대중과의 소통: 수사학과 명료성의 문제
공적 역할을 수행하는 철학자들에게 있어 자신의 사상을 교육받지 않은 대중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는 중요한 과제였다. 특히 문학 엘리트가 사용하는 그리스어('아티카어')가 일반 대중에게 이해 가능한지 여부가 핵심 쟁점이었다.
'아티카어' 사용과 이해 가능성
- 언어의 접근성: 최근 연구들은 대부분의 '아티카어주의(Atticizing)' 작가들이 전문 용어를 남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수사학적 언어가 일반 청중에게도 접근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 루키아노스(Lucian)의 풍자: 루키아노스는 청중에게 고학력자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어려운 아티카어 단어를 남발하는 연설가를 조롱했다. 그의 풍자는 일부 연설가들이 청중을 압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풍스러운 언어를 사용하는 전략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 명료성에 대한 강조: 플루타르코스(Plutarch)와 디오 크리소스톰(Dio Chrysostom)과 같은 학식 있는 저자들은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모호한 연설을 비판하며 명료성을 중시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아티카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철학, 도덕, 공적 행위에 대한 소홀함으로 이어진다고 우려했다.
후기 고대의 명료성에 대한 강조
- 테미스티우스의 증언: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철학자였지만 "포도 재배자나 대장장이도 집에 가져갈 만한 것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명료하게 말했다고 칭송했다. 그는 청중을 위협하기 위해 고어(古語)를 사용하는 가짜 철학자들을 신뢰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 즐거움을 통한 교육: 테미스티우스는 청중을 즐겁게 하기를 거부하는 철학자들을 비판했다. 그는 쓴 약과 함께 꿀을 주는 의사처럼, "즐거운 방식으로 치료하는 연설"을 통해 청중이 교훈을 더 잘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그의 메시지가 불쾌한 표현 방식 때문에 거부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철학적 설교의 대중적 인기와 증거
철학자들이 명료하고 대중적인 스타일로 연설했다고 주장하는 것 외에도, 이들이 실제로 일반 대중과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여러 증거가 존재한다.
견유학파의 역할
- 공적 현존감: 견유학파는 "덕 있는 삶이 지혜의 열쇠이며, 책을 통한 학문은 그렇지 않다"는 기본 원칙 때문에 다른 철학자들보다 대중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들은 공공장소에서 생활하고 가르쳤다.
- 대중의 이목을 끄는 전략: 공공장소에서 다양한 생리 현상을 해결하는 것과 같은 견유학파의 충격적인 행동은 스스로를 구경거리로 만들어 청중의 관심을 끌고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
- 대중적 친숙함: 디오 크리소스톰은 대중이 견유학파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격언들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언급했다. 이는 그들의 가르침이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대중 연설가로서의 지식인들
- 디오 크리소스톰: 그는 여러 도시의 집회에서 연설했으며, 자신의 고향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연설을 "유행가처럼" 서로 재연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 테미스티우스: 그는 자신이 연설할 때 극장이 군중으로 가득 찼으며, 그들이 환호하고 자리에서 뛰어올랐다고 묘사했다. 그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동시에 도울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도덕 교육 방식이 바로 대중 연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모든 시민이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매년 집회에 모여 연설가의 도덕적 가르침을 듣도록 법으로 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대중의 양가적 반응
철학자들은 대중으로부터 상반된 반응을 이끌어 냈다.
* 숭배: 3세기 로마에서는 "부유한 중산층" 사이에서 철학에 대한 관심이 퍼져나갔다. 이들은 석관에 자신을 철학자로 묘사하거나 철학자들 사이에 있는 모습으로 그리게 했는데, 이는 철학자가 영적인 인물로 존경받았음을 보여준다.
* 적대감: 많은 사람들은 철학자들의 도덕적 우월감을 싫어했다. 디오 크리소스토무스는 철학자의 망토와 긴 머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조롱과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다고 불평했다. 이러한 적대감조차 철학자들이 대중의 눈에 띄는 존재였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기독교와 이교도 지식인: 경쟁자이자 동료
기독교 설교자들은 광범위한 청중을 상대하는 학식 있는 인물로서 이교도 지식인들과 많은 공통점을 가졌다. 그들은 고전 교육(파이데이아)을 수용하면서도, 철학자의 정체성을 기독교 설교자의 필요에 맞게 전환시켰다.
철학자 페르소나의 기독교적 수용
- 외양과 윤리의 유사성: 기독교인들은 부(富)에 대한 견유학파의 거부 등 많은 전통적 윤리관에 동의했으며, 철학자의 외양(망토, 긴 머리, 수염)을 받아들였다. 이 "철학자 스타일"은 후대 그리스도 이미지에 영향을 미쳤다.
- 상호 비판: 양측은 서로를 '가짜 철학자'라고 비난하는 데 전통적인 공격 논리를 사용했다. 기독교인들은 견유학파의 자발적 가난을 '관심 끌기'라고 비판했고, 율리아누스 황제는 기독교 수도사들을 견유학파에 비유하며 두 집단 모두를 모욕했다. 이러한 비판은 두 집단이 대중의 눈에 도덕 전문가로서 유사하게 비쳤음을 보여준다.
개인적 관계와 상호 존중
- 4세기에는 기독교 지도자들과 저명한 이교도 수사학자 및 철학자들 사이에 깊은 유대 관계가 형성되었다. 바실리우스(Basil)와 리바니우스(Libanius)의 서신은 수사학적 표현에 대한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관계를 보여준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는 테미스티우스와 리바니우스를 공개적으로 존경했다.
-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는 자신의 신학 논문에 대해 이교도 수사학자인 리바니우스의 의견을 구하고자 했으며, 이는 두 집단 간의 지적 교류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진정한 철학'에 대한 기독교의 주장
-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은 시골 출신의 교육받지 못한 수도사들이야말로 수염과 지팡이로 현자인 척하는 이교도들을 능가하는 "진정한 철학자"라고 선언했다.
- 그는 가난한 사람도 따를 수 있는 기독교적 철학자 모델로 금욕적인 성자를 제시했다. 이 모델은 견유학파처럼 웅변가나 소피스트들과 맞서 도시 군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존재로 그려졌다. 이는 철학자의 이미지와 문화적 권위를 평신도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사례 연구: 이고니아의 암필로키우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의 사촌이자 리바니우스의 제자였던 이고니아의 주교 암필로키우스(Amphilochius of Iconium)의 경력은 기독교 주교가 어떻게 전통적인 소피스트의 특성을 보존하고 대중과 소통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 교육과 경력: 암필로키우스는 리바니우스 밑에서 공부한 후 콘스탄티노플에서 수사학자이자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후 금욕적인 삶을 추구했으나, 친구인 바실리우스의 압력으로 374년 이고니아의 주교가 되었다.
- 이교도 스승의 찬사: 놀랍게도 그의 스승인 리바니우스는 암필로키우스가 주교가 된 것을 축하했다. 그는 주교좌를 "연설을 위한 작전 기지"로 보았으며, "그대가 어떻게 군중을 움직이는지, 얼마나 멋진지, 함성이 어떻게 울려 퍼지는지에 대해 듣고 있다"고 편지에 썼다. 이는 리바니우스의 눈에 주교와 수사학자의 역할이 동일하게 비쳤음을 보여준다.
- 대중적 인기: 바실리우스 역시 암필로키우스를 인기 있는 연설가로 평가했다. 리바니우스는 암필로키우스의 임명 소식에 이고니아의 젊은이들이 수사학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암필로키우스가 지역 사회에서 수사학자로서의 역할을 계속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었음을 나타낸다.
- 설교 스타일: 그의 설교는 반복, 눈에 띄는 이미지, 그리고 청중을 이야기에 몰입시키는 극적인 서사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어, 나사로의 부활을 묘사할 때 그는 분해되는 시신의 세부 사항을 생생하게 묘사한 후, 예수의 기적으로 몸이 재구성되는 과정을 역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돌을 굴려라", "나사로야, 이리 나오너라"와 같은 성경 구절을 여러 번 반복하여 청중이 함께 따라 하도록 유도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식은 그의 인기가 일반 청중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시사한다.
결론
이교도 철학자, 소피스트, 웅변가와 같은 대중 연설가들은 일반 대중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그들과 소통하려 노력했다. 기독교 설교자들은 이러한 전통 위에 자신들의 역할을 구축했다. 그들은 성경에 기반한 기독교 교사들을 모델로 삼았지만, 동시에 이교도 철학자라는 대항마를 의식했다.
- 역할의 계승: 주교는 전통적인 철학자의 역할을 이어받았고, 강단은 수사학적 공연을 위한 새로운 무대가 되었다. 설교의 인기는 수사학적 연설에 대한 광범위한 사회적 관심과, 연설가들이 정보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전달하는 능력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 공통의 과제: 기독교 설교자들은 이교도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공적 삶과 사색적 삶 사이의 긴장, 하층 계급에 대한 양가감정, 화려한 수사학과 평이한 스타일 사이의 선택이라는 공통된 문제에 직면했다.
- 수사학의 중요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성직자가 설득력 있게 말하지 못하면 "단순한 대중"이 이단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형편없는 수사학적 능력은 청중과 연설가 모두를 신의 더 가혹한 처벌에 직면하게 할 수 있었다. 따라서 효과적인 설교술은 정통 교리를 수호하고 신자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필수적인 도구로 여겨졌다.
결론적으로, 후기 고대 사회에서 기독교 설교자의 역할과 인기는 대중에게 도덕을 가르치려 했던 철학자들의 오랜 전통을 이해할 때 비로소 완전히 파악될 수 있다. 이는 설교의 전례적 기능이나 문학적 기원을 넘어, 설교가 행해졌던 사회 문화적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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